미국 주도 ‘신 중동 평화협정’, 되레 전쟁 불씨 됐다

홍석재 2023. 12. 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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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하마스 전쟁]2020년 아브라함 협정부터 전쟁까지
2020년 9월15일 미국 백악관에서 압둘라티프 알자야니 바레인 외교장관(왼쪽부터),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압둘라 빈 자이드 나흐얀 아랍에미리트 외교장관이 ‘아브라함 협정’에 서명한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이유의 하나는, 내가 (중동에서) 이스라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 등 여러 국가와 긴밀히 협력하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달 24일(현지시각)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이 발언은 두달간 잔혹한 희생을 낳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 간 전쟁의 불씨가 어디서 시작됐는지에 대한 미국의 견해를 압축해 보여준다. 바이든 대통령은 “아랍 국가 대부분이 장기적 평화에 필요한 중동 지역 내 역학을 변화시키기 위해 서로 협력하는 데 큰 관심을 갖고 있다”며 “하마스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나란히 평화롭게 사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 탓에 이번 테러를 감행했다”고 말했다. 하마스가 지난 10월7일 전세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기습 공격에 나선 것은 자신이 추진해온 이스라엘과 사우디 간의 국교 정상화 협상을 뒤집기 위해서였다고 단정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하마스는 1만6000명 넘는 가자지구 주민들의 목숨과 230만명이 살던 도시의 괴멸적인 파괴라는 ‘생살’을 도려내고, 이스라엘과 사우디의 관계 정상화 협상을 일단 주저앉혔다. 사우디 등 주요 아랍 국가들이 더는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게 될 ‘완전한 고립’ 위기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와 함께 중동 문제의 근원인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선, 이 지역의 평화를 얻을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전세계에 다시 한번 일깨웠다.

바이든 대통령이 언급한 이스라엘과 사우디 간의 국교 정상화 협상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주요 외교 성과였던 ‘아브라함 협정’의 연장선상에서 추진돼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2020년 9월15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압둘라 빈 자이드 나흐얀 아랍에미리트 외교장관과 함께 백악관에서 “평화의 새 여명이 예고되고 있다”며 협정서에 사인했다. 바레인도 같은 날 이스라엘과 같은 협정을 맺었다. 유대인의 조상인 이삭과 아랍인 조상인 이스마일(이스마엘)이 한 아버지인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확인하며, 양국이 앞으로 평화롭게 공존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아랍에미리트와 바레인(9월15일)이 총대를 메자 수단(10월23일), 모로코(12월10일) 등이 뒤를 따랐다.

‘신 중동 평화구상’이라는 명목으로 추진된 아브라함 협정은 미국이 이스라엘과 수니파 주요 국가들을 한데 묶어 시아파 맹주국인 이란을 견제한다는 전략적 목표 아래 추진됐다. 이란은 바짝 긴장했고, 하마스도 당혹감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하마스의 최고 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야는 아브라함 협정이 공개된 석달 뒤인 그해 12월 가자지구 여러 무장정파를 한데 묶어 강력한 군사훈련에 돌입하는 작전명 ‘스트롱 필러’에 전격 착수했다.

2021년 1월 등장한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의 중동 내 영향력 확대를 막고 악화된 사우디와 관계를 회복하려 아브라함 협정의 확대를 결심한다. 이에 따라 지난 여름께부터 바이든 대통령의 강력한 중재 아래 사우디가 이스라엘과 관계 정상화의 ‘8부 능선’을 넘었다는 관측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뉴욕타임스는 9월19일 미국이 사우디에 한-미 상호방위조약과 비슷한 안전보장 협정을 맺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 이튿날 사우디의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미국 폭스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에 대해 “매일매일 가까워지고 있다. 처음으로 진지한 것 같다”며 “냉전 종식 이후 가장 큰 역사적 거래”라고 말했다.

이스라엘군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 사이 전투가 격화하고 있는 가자지구 남부 도시 칸유니스에서 이집트와의 접경지대 라파흐로 피란한 팔레스타인 아이들이 5일 대피소에 서 있다. 라파흐/UPI 연합뉴스

이런 급박한 정세 변화 속에서 하마스가 유대교 기념일인 초막절에서 이어지는 안식일이자 아랍이 이스라엘을 급습하며 시작된 욤키푸르 전쟁(4차 중동전쟁) 개전 50주년 다음날인 10월7일을 노려 대규모 기습 공격을 가했다. 오사마 함단 하마스 대변인은 개전 당일, 이 공격이 “이스라엘과 관계 정상화를 고려하는 아랍 국가들에 보내는 메시지”라고 밝혔다. ‘평화의 약속’이 될 것으로 기대했던 아브라함 협정이 끔찍한 전쟁의 불쏘시개로 변해버린 셈이다.

이 공격으로 하마스는 고립 해소라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래서 중동의 평화가 가까워졌는지 알 수 없다.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 독립된 국가로 공존하는 길은 더 멀어졌기 때문이다. 다만 대규모 민간인 피해를 낳는 가자 전쟁을 일단 멈춰 세워야 한다는 데는 국제사회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영국 가디언은 지난달 26일 “사람들이 잔인하게 죽어가고 있다. (아랍권에서 전쟁을 합리화하는) ‘에인 브레이라’(ein breira·‘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뜻의 히브리어)는 거짓말”이라고 지적했다.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

미완의 평화 ‘두 국가 해법’ 오슬로 협정은?

70년 이상 이어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갈등을 풀기 위해 국제사회가 내놓고 있는 해법은 1993년 오슬로 합의의 소중한 결과물인 ‘2국가 해법’이다.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은 미국의 중재 아래 1993년 9월13일 ‘오슬로 협정’을 맺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대표는 미국 백악관에서 서명을 마쳤다. 원래 정식 명칭은 ‘임시 자치 협약에 관한 원칙 선언’이었지만,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치열한 사전 비밀 협상이 이뤄져 ‘오슬로 협정’으로 불린다.
이 해법에 따라 양쪽은 서로를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고 평화적 공존을 약속하며,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서 5년 안에 팔레스타인 잠정 자치정부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각각 독립해 평화롭게 공존하자는 이 해법은 지금까지 꼬일 대로 꼬인 팔레스타인 문제의 실타래를 풀기 위한 유일한 대안으로 남아 있다.
1995년 9월 ‘2차 오슬로 협정’을 통해 1차 협정을 진전시키려는 합의가 이뤄졌다. 하지만 그해 11월4일, 라빈 총리가 이스라엘 근본주의 극우파에 암살당하며 크게 흔들리게 된다.
팔레스타인이 2국가 해법에 따라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영토로 삼아 독립하려면 풀어야 할 문제가 너무 많았다. 대표적인 난제가 정착촌 문제다. 오슬로 합의가 이뤄질 무렵 서안지구 내 정착촌 인구는 11만명이었지만, 현재는 그 네배에 이른다.
이후 사태는 악화돼갔다. 2001년 9·11 테러로 중동 정세가 뒤집혔고, 협상의 한쪽 당사자인 팔레스타인이 분열했다. 2006년 1월 총선거에서 하마스가 승리하자 팔레스타인은 이듬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서안지구)와 하마스(가자지구)로 쪼개졌다.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2007년 가자지구를 점령하자 봉쇄를 시작하며 격렬히 대립했다. 미국의 중재를 통한 평화교섭은 14년째 중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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