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샷] "적으로 적을 죽인다" 항암제가 된 바이러스

이영완 과학에디터 2023. 12. 7.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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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방광암 임상 3상시험서 효과 발표
피부암 치료제 이어 FDA 승인 2호 기대
암세포 직접 제거보다 면역반응 유도
면역항암제와 같이 쓰면 효과 더 커져
바이러스가 암세포(주황색)를 공격하는 모습의 상상도./Lightspring

지난 5일 미국의 바이오기업인 씨지온콜로지(CG Oncology)는 “자체 개발 중인 방광암 치료제를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패스트 트랙과 혁신의약품으로 지정했다”고 밝혔다. FDA는 심각한 질환에 대해 첫 치료제로 개발됐거나 기존 치료제보다 월등한 효능을 보이는 의약품에 대해 이와 같은 신속 심사 혜택을 주고 있다.

씨지온콜로지가 미 FDA로부터 인정을 받은 방광암 치료제는 바로 종양 용해 바이러스(oncolytic virus)이다. 적군을 다른 적군과 싸우게 하는 이른바 ‘이이제이(以夷制夷)’ 치료 전략이다. 코로나나 에이즈로 사람 목숨을 위협하던 바이러스가 암을 정복할 구원자로 떠오르고 있다.

◇암세포 녹이는 바이러스 치료제

종양 용해 바이러스는 말 그대로 암세포를 녹이는 바이러스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항암 바이러스라고 한다. 바이러스는 숙주 세포 안에서 복제, 증식한 뒤 밖으로 나온다. 이 과정에서 숙주 세포가 터져 죽는다. 항암 바이러스는 암세포만 공격하도록 변형된 형태이다. 정상 세포에 감염돼도 별다른 해가 없지만, 암세포에서는 엄청난 속도로 증식한 후 세포를 터뜨려 죽인다.

씨지온콜로지는 지난달 30일 비뇨기 종양학회 연례 학술대회에서 자체 개발한 바이러스 치료제에 대한 임상 3상 시험 중간 결과를 발표했다. 회사에 따르면 바이러스 항암제는 장기의 근육까지 침투하지 않은 방광암 환자 66명 중 64%에서 종양을 제거했다. 이런 종양을 내버려 두면 방광을 제거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임상시험 결과, 환자의 76%에서 종양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그중 74%는 종양이 최소 6개월 동안 재발하지 않았다.

항암 바이러스 원리./조선DB

이번 임상시험은 6개월 추적 관찰에 그쳐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런데도 미국 루이지애나 주립대 병원의 오메드 모벤(Omeed Moaven) 교수는 이날 사이언스지에 “종양 용해 바이러스 계를 뒤흔들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과학자들은 1960년대부터 항암 바이러스를 연구했다. 암 환자가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갑자기 병세가 호전되는 사례가 잇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미 FDA 승인을 받은 항암제는 미국 암젠의 ‘임리직(Imlygic, 상표명)’이 유일하다. 임리직은 성기나 입술 주변에 포진을 유발하는 단순 포진(헤르페스) 바이러스로 악성 피부암인 흑색종을 치료한다.

씨지온콜로지의 방광암 치료제가 신속심사 과정을 통과하면 임리직에 이어 미 FDA 승인을 받은 두 번째 항암 바이러스 치료제가 된다. 다른 항암 바이러스 3종은 미국 밖에서 항암제로 승인됐으며, 가장 최근에는 일본에서 2021년 뇌종양인 신경교종 치료제가 승인됐다.

◇종양 직접 제거 대신 면역 반응 유도

제약산업 연구개발(R&D) 데이터베이스를 운영하는 영국의 파마프로젝트에 따르면 2022년 현재 항암 바이러스 55종에 대해 임상시험이 진행 중이며, 그중 3종이 임상시험 후기(3상) 단계에 있다. 100종이 넘는 항암 바이러스가 동물 실험 단계에 있다. 한국에서도 신라젠과 코오롱생명과학, 진메디신, 젠셀메드 등이 항암 바이러스를 개발하고 있다. 연구논문 수도 최근 10년 사이 18배 이상 증가했다.

항암 바이러스 논문 수 추이./BRIC

항암 바이러스가 아직 개발 성공률이 낮은 것은 안전성 우려 때문이다. 지나치게 약한 바이러스를 사용해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과학자들은 최근 바이러스가 암세포를 죽이는 원리를 새로 이해하면서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시작했다.

과학자들이 환자에서 채취한 암세포를 분석해보니 바이러스 자체가 직접 제거하는 비율이 적다는 것을 확인했다. 대신 바이러스는 염증을 유발하고 T세포와 같은 면역 세포를 끌어들여 암세포의 방어 체계를 무너뜨리는 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까지 항암 바이러스 임상시험이 실패한 것은 환자들이 다른 치료의 부작용으로 이런 면역 체계가 이미 억제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제약·바이오 업체들은 최근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새로운 항암 바이러스를 개발하고 있다. 씨지온콜로지의 아데노바이러스도 그중 하나이다. 바이러스에 암세포 스스로 T세포의 공격을 촉진하는 분자를 만들도록 유도하는 유전자를 탑재했다. 아데노바이러스는 호흡기 질환을 유발하는 바이러스이다.

◇면역 항암제와 협업도 가능

다른 연구진도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변형해 치료 효과를 높였다. 미국 하버드 의대 산하 브리검 여성병원의 안토니오 키오카(Antonio Chiocca) 교수 연구진은 지난 10월 네이처에 유전자를 변형한 헤르페스 바이러스로 악성 종양인 교모세포종을 치료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교모세포종에 걸리면 2년 이내에 사망에 이른다.

암세포를 공격하는 T세포(파란색). 항암 바이러스는T세포 같은 면역세포를 유도해 암세포를 공격하도록 한다./미 슬로언케터링암센터

앞서 연구에서는 헤르페스 바이러스가 치료 도중 뇌 염증을 유발하지 않도록 증식에 필수적인 유전자를 제거했다. 이러면 바이러스가 약화해 치료 효과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브리검 여성병원 연구진은 해당 유전자가 복원된 바이러스를 사용했다. 대신 암세포에서만 작동하도록 설계했다. 연구진은 수술이나 다른 치료 후 암이 재발한 환자 41명을 대상으로 한 임상 1상 시험에서 안전성을 확인했다.

시티 오브 호프 병원(City of Hope Medical Center) 연구진은 지난해 ‘네이처 암’지에 바이러스가 암세포 주변에 면역 세포를 유인하는 분자를 전달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진은 다른 논문에서는 바이러스가 암세포 표면에 면역 세포인 대식세포를 부르는 항체를 붙이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대식세포는 암세포를 먹어 치운다.

항암 바이러스를 개선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기존 항암제와 같이 쓰는 것이다. 미국 다나 파버 암연구소 연구진은 최근 ‘암 면역학, 면역치료’에 항암 바이러스를 면역 관문 억제제와 함께 써 흑색종 환자를 치료했다고 밝혔다.

면역 관문은 면역 세포가 정상 세포를 공격하지 않도록 표시를 하는 단백질이다. 암세포가 종종 이를 악용한다. 면역 관문 억제제는 암세포가 면역 관문과 결합하지 못하고 다시 면역 세포의 공격을 받도록 한다.

연구진은 흑색종에 걸린 환자에게 면역 관문 억제제와 함께 소아에게 가벼운 호흡기 증상을 유발하는 바이러스를 투여했다. 그 결과, 면역 관문 억제제만 투여한 환자는 42%가 암세포가 줄었지만, 바이러스를 같이 쓰면 47%에서 효과가 나타났다. 앞서 미국 듀크대 연구진은 지난 2018년 미국임상종양학회(ASCO)에서 소아마비 바이러스와 면역 항암제를 동시 처방하면 기존 치료제가 듣지 않는 악성 유방암도 치료할 수 있다는 동물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아데노바이러스의 전자현미경 사진. 미국 바이오기업 씨지온콜로지는 아데노바이러스의 유전자를 변형해 방광암을 치료하는 데 성공했다./Wellcome collections

항암 바이러스는 헤르페스 바이러스나 아데노바이러스, 소아마비 바이러스가 많이 쓰였다. 최근에는 그보다 치명적인 바이러스도 항암 치료제로 개발되고 있다. 브라질 상파울루대 연구진은 2020년 뇌종양에 걸린 생쥐에게 지카 바이러스를 주사해 부작용 없이 암세포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

임신부가 모기를 통해 지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나중에 태어난 아기는 두뇌가 제대로 발달하지 못하는 소두증(小頭症)에 걸린다. 지카 바이러스는 다른 병원체와 달리 뇌를 보호하고 있는 내피세포를 뚫고 들어가 신경줄기세포를 공격한다. 상파울루대 연구진은 지카 바이러스가 뇌를 공격하는 능력을 뇌종양 치료에 활용했다. 지카 바이러스는 인체의 면역력을 강화시켜 암세포와 싸우게 했다.

참고 자료

Nature(2023), DOI: https://doi.org/10.1038/s41586-023-06623-2

Cancer Immunology, Immunotherapy(2023), DOI: https://doi.org/10.1007/s00262-022-03314-1

Nature Cancer(2022), DOI: https://doi.org/10.1038/s43018-022-00448-0

Clinical Cancer Research(2022), DOI: https://doi.org/10.1158/1078-0432.CCR-21-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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