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정치학자가 기록한 어느 스님의 고난과 해원

임경구 기자 입력 2023. 12. 7. 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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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도 못 뗀 핏덩이 시절에 어머니와 헤어졌다.

소설 형식이지만 생전 원경스님의 상세한 증언과 어머니 정순년의 회상을 꼼꼼히 기록하고 사료 검증과 현장 탐사로 재검증한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지리산, 가마골, 회문산, 제주도 등 삶의 흔적을 함께 훑으며 손 교수가 사진으로, 영상으로 담은 원경스님의 생전 모습이 <한 스님> 의 촘촘한 밀도를 가늠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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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books] <한 스님> : 박헌영 아들 원경 대종사 이야기

젖도 못 뗀 핏덩이 시절에 어머니와 헤어졌다. 월북해 생을 마감한 아버지의 존재는 훗날에야 알았다. 그렇게 부모와 생이별해 남로당 비밀 아지트에서 고아처럼 지냈다. 한국전쟁이 터졌다. 먼 친척 손에 이끌려 아홉살 어린 나이에 머리를 깎고 지리산으로 숨어들어가 '애기 빨치산' 생활을 했다.

북으로 간 아버지의 처형 소식을 나이 열일곱에 들었다. 스물이 넘어 처음 만난 어머니에게선 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세상이 원망스러워 음독을 했지만 생이 질겼다. 낭인처럼 전국을 떠돌았고, 강제노역에 끌려가기도 했다. 어디를 가나 세상은 '빨갱이 자식'이란 돌을 던졌다. 온통 잿빛 뿐인 '박헌영의 아들', 박병삼 생존기다.

원경스님이 주지를 맡았던 평택 만기사에는 '해원탑'이 있다. 박헌영 추모탑인데, '원한을 푸는 탑'이라는 의미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이를 갈던 박병삼 시절의 원한을 내려놓은 원경의 마음이 전해지는 탑이다.

남한에선 '빨갱이', 북한에선 '미제의 간첩'으로 내몰려 '남북한에서 모두 저주받은 자' 박헌영의 정당한 복권이 이뤄져야 역사의 해원도 가능할 터.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쓴 <한 스님>(이매진 펴냄)은 박병삼, 즉 원경의 일대기로 한국 현대사를 파헤친 책이다.

소설 형식이지만 생전 원경스님의 상세한 증언과 어머니 정순년의 회상을 꼼꼼히 기록하고 사료 검증과 현장 탐사로 재검증한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마침 원경스님의 입적 2주기 즈음에 출간됐다.

정치학자인 손 교수가 불가에 귀의한 스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한 이유는 "그 사람의 삶이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가장 응축해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책은 빨치산을 이끈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 김삼룡·이주하 등 남로당 핵심 인물들, 흐릿하지만 한산스님을 매개로 박헌영에 관해 남아있는 원경스님의 어린 시절 기억을 촘촘하게 재현했다. 해방정국, 한국전쟁, 군사정권 등 세상의 격변 역시 시대적 배경을 넘어 원경의 일생 마디마디에 스며들어 있다.

냉전이 끝나고 러시아로 건너가 이복 누이 박비비안나를 만났던 원경의 회한도 담겨있다. 환갑 언저리에 처음 만난 박헌영의 아들과 딸은 언어가 제대로 통하지 않아 손만 잡았을 뿐인데도 서로가 가여워 눈물이 흘렀다고 한다.

▲<한스님> 손호철 지음 ⓒ이매진

2년 전 홀연히 입적한 원경스님을 기리는 이들이 6일 '백기완노나메기재단'에서 추모식을 겸한 <한 스님> 출판기념회에 모였다.

지리산, 가마골, 회문산, 제주도 등 삶의 흔적을 함께 훑으며 손 교수가 사진으로, 영상으로 담은 원경스님의 생전 모습이 <한 스님>의 촘촘한 밀도를 가늠케 했다. 노래 '부용산'을 부르는 원경의 육성도 울렸다. 누군가 평했다. "원경 스님이 '한'이 많아 '한 스님'이고, 큰 스님이어서 '한 스님' 같다"고.

손 교수는 1988년 신륵사에서 처음 만난 이래 30년 가까이 원경과 막역한 인연을 쌓았다고 한다. 생전 원경과 답사에 동행했던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 심지연 경남대 명예교수, 양승태 이화여대 명예교수, 최갑수 서울대 명예교수 등도 자리를 함께 했다.

추모 모임의 대표 격인 김세균 교수는 "바람처럼 왔다가 한국사회의 강풍 속에 살았지만, 따뜻한 훈풍을 남기고 사라졌다"며 원경스님을 기렸다.

저자인 손 교수의 잦아들지 않는 그리움은 책의 서문에 절실하게 배어있다. "원경 스님은 평소에 말했다. '산 자의 그리움은 족쇄와 같아서 살아 있는 사람이 내려놓지 않으면 망자는 떠날 수가 없습니다'. 이제 나도 그리움을 내려놓으려 한다."

▲ 원경 스님 추모식에 모인 참석자들이 묵념을 하고 있다. ⓒ프레시안

[임경구 기자(hilltop@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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