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중세 고려의 소와 소고기

정은정 부경역사연구소 연구원 2023. 12. 7.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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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의 질환예방·번식 위해 법·제도적 철저하게 관리
럼프스킨 탓 살처분 속출…방역 강화로 피해 줄여야
정은정 부경역사연구소 연구원

럼프스킨병으로 소가 떼죽음 당하고 있다. 럼프스킨은 모기 침파리 같은 흡혈 곤충이 감염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성 질병이다. 인수 공동의 대표적 소 질환은 광우병과 탄저병이다. 중세의 소 탄저는 인간의 생명에 치명적이었다. 소 탄저는 유목 위구르족을 멸망시킨 대표적 인수 공동의 질병이었다. 고려도 몽골 침입 전후 탄저를 앓던 소를 만진 사람이 불에 덴 것처럼 피부가 벗겨졌다.

소의 각종 질병을 관리하기 위해 동아시아 고대부터 수의학서는 상호 공유됐다. 안기집 마의방 동인경험방의 중국 수의학서가 전래됐다. 백제 아직기는 양마술을 일본에 전파했다. 고구려 승려 지총은 일본에 우유를 전해줬으며 혜자법사는 한토수의학 수립에 크게 기여했다. 고려의 수의학서는 이조년이 매와 가축에 대해 찬술한 응골방이 있다. 고려말 조선 초에 조준 방사량 권중화 한상경이 찬집한 신편마의방 우의방도 있다.

소의 질환과 전염병 관리는 물론 가축 사육장의 위생도 철저히 감시했다. 소 관리 차원에서 중앙에 전목시 사복시를 설치하는가 하면 외방에 목감을 파견했다. ‘수의’라는 용어는 중국 주나라의 관제에서 유래한다. 고려에서는 문종 30년 수의박사 관직이 외방의 12목에 설치됐다. 충렬왕 14년에는 마축자장별감을 설치했다. 이로써 암말 암소를 가려내어 소 마리 수 증식에 크게 기여했다. 전기에는 가축을 잡축이라 표현하고 잡축에 소나 말이 포함되다가 고려말에는 잡축, 소, 말을 따로 관리했다. 그만큼 소와 말의 위상이 커졌다는 뜻이다.

소의 질병 번식 사육에 관한 법령을 두어 개체수 증식에 노력해 왔지만, 불교국가 고려에서는 신앙의 특성상 수렵이나 소 도살은 선호하지 않았다. 농사짓는 일하는 소를 보호하기 위해 꾸준히 도축금지령이 내려졌다. 광종 19년 도축을 금지하고 문종 20년에도 3년간 도축이 금지됐다. 예종 2년 우금령이 내려졌다. 원 간섭기에 들어선 원종 12년 원은 고려에 농우 6000마리를 요구했다. 당시 원에 공급할 소가 부족하자 곽여필을 몽골에 파견해 협상하기도 했다.

소(농우) 징발에 실패한 몽골은 목축에 능한 몽골인과 말 160필, 우량품종의 소를 끌고 제주에 목장을 설치했다. 충렬왕 23년 이후부터 원에 소를 보낼 정도로 개체수가 많이 늘었다. 개체수의 증가에 따른 소 육식이 늘자 충숙왕 12년 이후 다시 우금령이 반포됐다. 공민왕 11년에는 농우 확보와 보호를 위해서 금살도감을 설치했다.

원 간섭기에 안렴사를 지낸 마계량은 소고기 외에 소내장, 소대가리도 즐겨 먹었다. 여러 종류의 고기나 다양한 소 부위를 즐겨 먹었던 탓인지, 고려 사람을 괴롭혀 온 질병 가운데 육독(고기 독)이 있다. 향약구급방에는 육독을 꿩의 뇌수, 돼지 쓸개로 치료했다. 농우로 살다 간 소는 식육되었고, 일소는 매우 질겼다. 질긴 고기를 다채롭게 알뜰하게 먹기 위한 고민도 있었다. 송 원 이후 해상실크로드가 확장되자 원과 유구국에서 후추를 수입해 왔다. 비로소 고기에 조미를 가할 수 있었다.

1213년 이전 태안에서 난파된 마도 2호선에는 3살 반~4살 정도로 추정되는 소뼈가 출토됐다. 1265~1268년 사이 침몰한 태안 마도 3호선에서도 24~30개월 연령의 소뼈가 나왔다. 제사용이라 하더라도 남은 소고기는 식육했을 것이다. 소는 하나도 버릴 데가 없다. 소피를 문에 뿌려 사악한 귀신을 저지하거나, 독한 역질귀신을 막기 위해 소고기를 먹었다. 소고기는 원구 선농 적전단의 정기적 국가 의례에 쓰였다. 관인 사회에도 제수용품이나 보양 치료 목적으로 선물이나 뇌물로 소고기가 거래됐다. 국왕은 군인에게 호궤라 하여 소고기를 나눠 위로해 주었다.

소고기의 지방과 단백질 성분은 탄탄한 아교 역할을 해 무기 제작에 필수품이다. 소젖은 고려 때 팔관회 행사의 연회 음식이나 귀한 약재로 대접받았다. 소젖(우유) 생산처는 개경 도심을 약간 비껴난 하천변에 소재한다. 고려말 수유적(수유칸)이 소젖 생산을 담당했다. 소젖으로는 타락죽을 만들었다. 소의 가죽 힘줄 뿔은 세금으로 거두어들였다. 관인이 착용하던 물소 가죽띠는 비상약품으로 급할 때 삶아 원기를 돋우는 데 쓰였다. 이토록 귀한 소가 죽어갈 때 마단에서 목신(가축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 소의 혼을 달래주었다.


귀한 대접을 받아왔던 소이다. 소의 질환을 유발하는 매개체는 사람을 따라, 또 탈 것을 따라 빠른 속도로 퍼져간다. 아픈 소는 치료가 되지 않으면 결국 살처분한다. 농민 축산업자는 가족 같은 소가 산 채로 흙에 묻히는 것을 고스란히 지켜봐야 한다. 그들을 위한 심리 치유프로그램도 있어야겠다. 이미 1870년 로버트 코치는 탄저로 죽은 동물을 묻은 토양에서 수십 년 후에 균이 재발견된 사실을 언급했다. 그런 만큼 철저한 방역과 발 빠른 대처로 살처분은 면했으면 싶다. 인간 너머 인간과 함께 할 동물권, 동물복지를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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