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설] 헌치백의 욕망

기자 2023. 12. 6.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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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상의 계절이다. 올 한 해 동안 출간된 좋은 문학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고민은, 우리 사회는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까지 왔는지를 가늠해보는 작은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책이라면, 2023년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인 이치카와 사오의 <헌치백>(양윤옥 옮김, 허블)을 빼놓을 수 없다.

줄거리는 이렇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척추가 조금씩 휘기 시작하여 중학교 2학년 이후 30년째 제 발로 걸어보지 못한 40대 여성 장애인 샤카. 전신의 근육이 약화되어 심폐기능도 정상치의 산소 포화도 유지하지 못한 채 간병인과 호흡기 없이는 살아갈 수 없지만, 부모의 재력 덕분에 원룸 건물을 개조한 장애인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소설의 핵심은 그다음부터다. 샤카는 아르바이트 삼아 웹 미디어 기사를 쓰는 프리라이터로도 활동하고 있는데, 그녀의 주요 업무는 남성의 시점으로 가상의 성매매 업소 체험담을 창작하는 것이다. 다시 태어나면 욕망의 대상이 되는 여성으로서 성노동자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틈틈이 트위터에 올리기도 한다.

더 문제적인 대목은 이것이다. 비장애인 여성처럼 출산과 양육을 할 수 있는 육체적인 조건은 안 되지만 생식 기능에는 문제가 없으니, 거액을 들여 비장애인 남성을 고용해서라도 임신과 중절까지는 해보고 싶다는 것. 임신중지가 누군가에게는 불가피한 선택으로 인한 비극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강렬한 욕망일 수 있다는 아이러니. ‘태아 살해 욕망’이라고 할 법한 이 불온하고 비도덕적인 욕망에 대한 샤카 자신의 태도는 자못 냉소적이다. 장애를 가진 태아를 임신할 경우 중절해야 한다는, 그러니까 장애인을 낳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무참한 주장도 있지 않던가? “그렇다면 죽이기 위해 잉태하려고 하는 장애인이 있어도 괜찮은 거 아닌가? 그걸로 겨우 균형이 잡히잖아.”

사회에서 금기시된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스스로를 헌치백(척추장애인) 괴물이라 칭하는 샤카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익숙해왔던 장애 여성의 재현 문법을 근본적으로 묻게 만든다. 수많은 창작물에서 장애 여성이란 성적 욕망의 주체도 대상도 아닌, 그저 ‘순수’한 이미지로 타자화되어온 것은 아닌가. 혹은 돌봄을 받는 취약한 대상으로서 단지 위험으로부터 안전해져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최대치이자 유일한 권리로 받아들여져온 것은 아닌가. 그러는 동안 자신의 욕망에 따른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금기에 저항해온 다양한 실천은 비가시화되어온 것은 아닌가. 샤카는 그저 취약한 돌봄 대상자가 아니다. 돌봄 하우스를 총괄하는 능숙한 관리자이자 성 구매자인 동시에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공동체의 규범 속에서 협상하는 글쓰기 노동자이다. 여기에서 장애는 결핍과 무능을 증명하기 위한 장치라기보다는, 차라리 그러한 결핍과 무능에서 배태된 욕망을 실천하기 위한 조건이다.

그러니 이 소설의 감동을 ‘이런 욕망을 가진 장애 여성도 있다’는 식의 뒤늦은 충격이나 ‘발칙한 타락을 꿈꾸는 상상력을 지지한다’는 식의 나이브한 응원으로 끝낼 수는 없다. 샤카는 말한다. 앉아서 책을 들어 페이지를 넘길 수 있어야 한다는 건강을 요구하는 종이책을, “그 특권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책 애호가들의 무지한 오만함을 증오한다”고. 누군가에게는 전자서적에는 없는 냄새와 감촉을 체험하게 하는 아름다움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구부러진 등뼈를 압박해 폐를 짓누르는 고통일 수 있다고. 임신이든, 독서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생산성의 사각지대를 폭로한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을 통해 일본의 장애 담론이 어디까지 왔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이제 샤카의 이 낯선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우리의 수준을 질문할 때다.

인아영 문학평론가

인아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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