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진상의 역설
비교적 오래된 이야기지만, 청어는 한때 우리네 겨울 밥상을 풍성하게 만든 대표 생선이었다. 오죽 흔했으면 청어로 과메기를 만들 정도였을까 싶지만, 기후변화로 인해 이제는 꽁치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날이 쌀쌀해지면 살에 기름기가 올라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보니, 겨울이 되면 조선시대 왕의 밥상에도 생청어가 빠지지 않았던 듯하다. 이 시기 동해와 남해 일부를 관할했던 경상감사 진상품 가운데 하나가 청어였던 이유이다.
272년 전인 1751년 음력 10월18일, 경상감사 조재호는 시름에 빠져 있었다. 매월 음력 보름(15일)이면 끝냈어야 할 진상이 3일이 지나도록 아직 이루어지지 못한 탓이었다. 다른 물품들은 품질과 수량 점검을 거쳐 진상 준비를 모두 마쳤지만, 아직 생청어가 봉입되지 않고 있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음력 10월 초부터 가능한 모든 장비와 인력을 동원하여 청어잡이에 나서도록 독려했지만, 그해 유난히 따뜻했던 바닷물로 인해 청어가 잡히지 않은 탓이었다. 송구함으로 몸 둘 바를 모르는 마음을 담아 진상이 늦은 사유를 왕에게 보고하는 한편, 바다를 끼고 있는 지방관들에게는 강한 질책성 공문을 발송했다.
음력 12월이면 지방관에 대한 경상감사의 인사 평가가 있는 만큼, 질책성 공문이 어떤 역할을 할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단 한 번의 낮은 인사 평가만으로도 파직될 수 있는 지방관들 입장에서, 이제 청어는 관료로서의 미래가 걸린 물품이 되었다. 지방관들은 아전들을 다그쳤을 터였고, 그 부담은 백성들에게 힘든 고통으로 증폭되었을 것이다. 이렇듯 청어밖에 보이지 않는 관료들의 눈에는 자신이 들어가지 않을 바다의 위험성까지 보일 리 만무했다. 무리한 재촉은 점점 커졌고, 결국 사고로 이어졌다.
고성현(현 경남 고성군 일대) 관료들의 재촉에 못 이긴 남촌면 백성 4명이 바다에 나가 그물질하던 중 배가 광풍을 만났다. 청어를 잡기 위해 무리하게 먼바다를 택했던 게 원인이었다. 4명의 젊은이들은 배와 함께 바다에 휩쓸려 들어갔고, 결국 그들은 육지로 돌아오지 못했다. 마병보군 김명삼(26), 격군 이홍익(16), 사노비 찬장(17), 그리고 모군 추일담(17)이 생명을 잃었다. 김명삼도 많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그를 제외한 세 명은 이제 갓 군역을 지기 시작한 10대 후반의 소년들이었다.
비교적 경험 많은 김명삼이나 바다에서 노를 젓는 일을 했던 이홍익이야 그렇다 쳐도, 사노비 찬장이나 모군 추일담의 죽음은 당시 그들이 진상품 마련을 위해 어떠한 상황까지 몰렸는지 증언한다. 모군은 말 그대로 ‘모집된 역군’으로 돈에 고용된 미숙련 잡부였다. 청어가 잡히지 않으니, 종살이하던 사람부터 숙련되지 않은 모군까지 동원하여 바다로 내보냈던 것이다. 제2, 제3의 사노비 찬장이나 모군 추일담과 같은 사람들이 준비되지 않은 채 진상품 마련을 위해 바다로 내몰렸을 상황이 그려지는 대목이다. 이 보고를 받은 경상감사 조재호 역시 충격을 받았다. 청어 진상을 유예해 달라는 보고서를 올리고, 속죄하는 마음을 담아 죽은 이들의 이름을 기록으로 남긴 이유였다.(출전: 조재호, <영영일기>)
왕의 입장에서야 굳이 청어를 먹지 않은들 어떠랴? 그러나 진상품이 충성의 증표가 되고, 지방 관료의 미래를 결정하는 일이 되면, 백성들은 청어를 위해 목숨을 걸 수밖에 없다. 청어가 왕의 식단을 풍성하게 할 수 있고, 그렇게 하는 게 신하 된 도리라고 강요받으면, 그들은 백성들에게 위험을 강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어떤 권력도 목숨을 걸고 자신의 기호와 관심을 충족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겠지만, 충성스러운 관료 조직은 최고 권력자의 작은 관심과 필요에도 백성들의 목숨을 요구하곤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듯 증폭된 백성들의 고통 앞에서 ‘자신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만큼 무책임한 말도 없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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