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석의 어차피 혼잔데] 설거지를 위한 지리학

한겨레 2023. 12. 6.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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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석의 어차피 혼잔데]

‘개구리 중사 케로로’는 지구를 침략하러 왔다 붙잡혀, 설거지 전문의 가사 노예가 된다.

이명석 | 문화비평가

 혼자의 삶은 섬과 같다고? 그렇다면 그 섬은 칠레처럼 좁고 길 것이다. 기후는 열대와 온대와 한대에 걸쳐 있고, 지형은 정글과 사막과 고원을 품고 있다. 그래서 브라질처럼 크고 둥그런 나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겪는다. 단출한 삶을 꿈꾸며 독립생활에 나선 친구들이 온갖 집안일에 치이며, 그에 필요한 도구들을 좁은 집에 구겨 넣으며 좌절하는 이유다.

“그러니까요. 물도 채우고 매뉴얼대로 했는데 에러 표시만 뜬다고요.” 충동적으로 인터넷에서 중고 식기세척기를 사버렸다. 생각보다 덩치도 크고 놓을 위치도 애매했지만, 그래도 시원하게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았다. 웬걸? 곧바로 말썽을 일으켜 판매상과 통화해야 했다. “멀쩡히 잘 됐는데 왜 그럴까요? 비슷한 걸 찾아 연락드릴게요.”

기진맥진해 침대 겸 소파에 몸을 던졌다. 나는 왜 안 하던 짓을 했을까? 언제나 가격, 디자인, 성능을 철저히 따지는 계획형 소비자임을 자처하는 주제에. 신혼살림의 삼대 논쟁거리였던 로봇청소기, 빨래건조기, 식기세척기가 이제 1인 가구의 고민이 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앞의 둘엔 거의 관심이 없다. 오직 설거지만이 오랜 원한의 대상, 자취력 40여년의 최대 난제다.

“나는 설거지하는 남자가 그렇게 섹시하더라.” 엠티나 여행을 가서 그릇을 씻고 있으면 이런 말을 하는 여자들이 있다. 나는 웃고 말지만, 그 말이 전형적인 가스라이팅이라고 생각한다. 평소 남자들이 집안일에 손도 안 대니 설거지라도 시키려고 꾸며낸 말이다. 물론 그 배후엔 가사노동은 여성의 몫이라는 거대한 가스라이팅이 도사리고 있다. 혼자의 삶엔 그런 심리전이 의미 없다. 앞치마를 두른 자신의 뒤태를 거울에 비춰보며 침 흘리는 사람이 아니라면.

십여년 전 요리 프로그램이 한창 유행을 타던 때부터 나는 뭔가 불편했다. 요리사들이 난타 공연을 하듯 온갖 조리도구들을 내다 쓰고, 음식을 멋지게 보이려고 몇번씩 그릇에 옮겨 담을 때마다 괴로웠다. “그런데 저 설거지는 누가 다 해?” 오늘은 유튜브 광고에서 부부 연예인이 신나게 요리해 먹고선 싱크대에 쌓인 그릇들을 보며 말했다. “설거지는 어떻게 해?” 짜잔! 세제가 빛을 내며 등장했다. 우습지도 않았다. 광고회사 부회장이었던 제임스 시겔은 소설 ‘탈선’에서 주방세제는 ‘광고의 시베리아로 가는 표지판’이라 했다. 어차피 뻔하다. 마지막엔 주부가 그 제품이 인생을 바꿔놓았다는 주절거림으로 끝난다.

요리는 플러스를 만들고 설거지는 마이너스를 메꾼다. 앞쪽이 훨씬 화려하고 멋있다. 유명 셰프 뒤에서 밤새 기름 범벅인 그릇과 조리도구를 닦고 말리고 정리하는 보조들은 화면에 나오지 않는다. 혼자만의 주방에선 이런 분업도 불가능하다. 젊은 직장인들이 외식비, 배달비 부담이 크다고 호소하자 ‘직접 해먹으면 싸잖아’하시는 분들이 있다. 가장 간단한 요리는 밀키트를 사 와 데우는 거겠지? 그런데 더러워진 그릇은 어떻게 하나? 정부가 ‘적정 근로시간’을 정할 때는 출퇴근 시간은 물론 이렇게 먹고 씻고 정리하는 시간까지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중고판매상의 전화가 왔다. “이번 건 틀림없습니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그릇을 채우고, 전용세제를 넣고, 물을 부은 뒤 버튼을 눌렀다. 조성진의 쇼팽 연주를 들으며 열대어 어항을 들여다보듯 식기세척기의 샤워쇼를 감상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피시식 김을 뿜어내며 일을 마쳤다. 기특하긴 했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뇌, 눈, 손이 만들어 내는 놀라운 협업의 예시로 피아노 연주를 드는데, 설거지야말로 더 적절한 예가 아닐까? 기계는 아직 멀었다.

로봇에겐 못 맡기지만 가치는 인정해 주기 싫은 노동은 결국 그림자 인간에게 돌아간다. 주부, 주방견습생, 이제는 최저임금 이하의 외국인 가사노동자. 아이들은 가사노동을 멸시하고 설거지를 위한 운동피질을 발달시킬 기회를 놓친다. 그들은 공부에 매달리며 청소, 빨래, 설거지가 없는 삶을 기대하겠지만, 언젠가 혼자의 집에서 깨달으리라. 자신의 섬 한가운데 싱크대라는 이름의, 끝없이 더러운 그릇이 태어나는 거대한 늪이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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