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을 젊은 튀르키예 여성이 연기한다고?
신파로 신파를 난타하는 ‘신파의 세기’
손발 오그라들게 하는 과장된 몸짓에, 울고불고 뒹군다. 격정적 음악이 깔리면서 감정은 과잉되고, 끝내 눈물 콧물 바다다. 한때 연극의 ‘뉴웨이브(새 물결)’였으나 지금은 한물간 낡은 문화로 취급되는 것, 하지만 한국 드라마가 세계적 맹위를 떨치게 된 요인이기도 한 것, 바로 ‘신파’다. 신작 연극 ‘신파의 세기’는 스스로 신파가 되어 신파를 난타하는데, ‘국뽕’의 얼굴로 나타나는 신파엔 통렬한 어퍼컷을 날린다. 해학과 유머에 현실감각을 버무린 대사들과 극 중 극에선 권력과 정치에 대한 풍자도 제법 신랄하다.
여러 희곡상을 휩쓴 정진새(43)가 쓰고 연출한 연극은 공상과학적 설정에 허무맹랑한 상상력을 곁들였다. 한국의 케이(K)팝과 케이(K)신파, 그리고 브라질의 삼바 등 3개 팀이 입찰 경쟁에 나선다. 유망한 광물이 발견돼 하루아침에 돈방석에 앉은 가상의 중앙아시아 신생 국가 ‘치르치르스탄’이 국민문화 부흥을 목표로 내건 30억 달러 프로젝트다. 한국 유학 경험이 있는 공주 ‘마리 클리셰’는 ‘국뽕’을 자아내는 케이신파의 위력을 알고 있다. ‘기재부의 등쌀’에 못 이겨 파견된 한국 국립현대극장 직원 미스터 게이가 주인공. 케이신파의 위력을 내보이려 현지 배우를 통해 ‘울지마라 홍도야’ ‘약속’ ‘명량’ ‘국제시장’ 등의 작품을 패러디한 극 중 극을 선보인다.
캐스팅부터 파격이다. 장군 이순신이라면 지긋한 나잇대에 건장한 체구의 한국 남성을 상상하기 마련. 하지만 이 도발적인 연극에서 ‘사즉생, 필즉사’를 외치는 이순신을 튀르키예 태생 젊은 여성 배우 베튤(32)이 연기한다. 그는 6살 때 가족과 함께 이주한 뒤 한국 일반 학교에 다녀 한국어가 모국어다. 최근 서울 대학로 쿼드 극장에서 만난 그는 “배역을 가릴 처지가 아니라 제안을 덥석 받았다”며 웃었다. 베튤은 “뭔가 틀을 깨트릴 때 쾌감을 느낀다”며 “연극의 이런 의도가 잘 닿겠느냔 고민은 있다”고 말했다.
사실 그에게 신파적 요소는 높다란 장벽이었다. “외국인이 신파적으로 소비되는 방식은 딱 두 가지거든요. ‘한국이 좋다’는 국뽕의 맥락,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처럼 불쌍히 여기는 시선이죠.” 그는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서인지 신파적 요소가 커지면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 했다. 그는 “한국말 못하는 연기를 해달라는 요구가 많아 아예 프로필에 한국어가 모국어라고 써놓았다”며 “제가 이순신을 맡았다는 것 자체가 이 연극의 방향성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연극에서도, 영화에서도 신파는 힘이 세다. 가족과 국가를 말하고, 이웃을 불러내면서, 실재하지 않는 것들이 진짜로 존재한다고 강하게 믿게 한다. 정진새에게 신파는 처음엔 ‘극복할 대상’이었다가 적당히 쓰면 관객도 좋아하고 배우도 만족하는 ‘불가피한 것’으로 변했다. 그는 “전 세계 사람들이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좋아하는 요소가 케이신파라는 지점이 놀라웠다”며 “신파가 불량식품 같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 세계인이 이걸 즐기는 상황”이라며 웃었다. 그렇지만, “가족주의 신파는 버티는데, 국수주의가 깔린 ‘국뽕신파’까지 동의하긴 어렵다”고 했다.
120분 분량의 연극 내내 객석에서 웃음이 번진다. 과잉이 본질인 신파에 과장을 더하니 코미디가 되는 거다. 정진새는 “신파를 비판하는 척하면서, 신파를 이용하다가 권력의 도구가 되는 존재들을 비판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 작품은 연극에 대한 연극이기도 하다. “좋은 작품 10개 하면, 아파트 한 채~정도의 빚이 생긴다”는 대사나, “예술가, 정치인, 성직자, 군인이 되지 말고 그저 건물주가 되어라”란 대사에서 온전한 공연 공간이 없어 이리 내몰리고 저리 내쫓기는 연극계의 실상이 묻어난다. 서울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대학로 극장 쿼드에서 17일까지.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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