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력 잃고도 못 잊은 캔버스… 손끝을 붓 삼아 세계를 칠하다

유승목 기자 2023. 12. 6.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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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사전적 정의를 요약하면 이렇다.

통제되지 않는 붓 대신 손을 캔버스에 가져다 댄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틀에 매지 않고 벽에 펼친 캔버스에 핀이나 못 등으로 윤곽을 잡고, 이를 연결해 만든 선을 따라 손끝에 묻힌 물감으로 색을 입힌다.

지난달 30일 전시장에서 만난 솔라노는 "눈이 보이지 않으니 캔버스에 못을 꽂아 전체적인 아우트라인을 잡는다"며 "손으로 터치하면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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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뉴엘 솔라노 국내 첫 개인전 ‘파자마’
캔버스에 핀·못으로 윤곽 잡고
손가락에 물감 묻혀 채색 작업
2014년 HIV로 시각 잃었지만
유년 시절·좋아하는 여행지 등
사진 찍듯이 생생하게 되살려내
“늘 좋은 기억 떠올리고자 노력”
Mi Primer Beso(나의 첫 키스). 페레스프로젝트 제공
Pijama(파자마). 페레스프로젝트 제공
El otro Disfraz de Jazmin(또 다른 자스민 의상). 페레스프로젝트 제공
지난달 30일 전시 오프닝에서 블록을 쌓아 올리는 퍼포먼스를 펼치는 마뉴엘 솔라노의 모습. 유승목 기자

‘미술’의 사전적 정의를 요약하면 이렇다. ‘시각(視覺)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예술’. ‘그린다’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본다’는 감각을 담보한 놀이다. 적어도 선이나 색으로 형상을 만들어내는 회화에서 ‘보이지 않는 화가’는 상상하기 어렵다.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본다’는 말은 낭만은 있지만 현실적이지 않다. 어둠에 갇힌 채 캔버스에 물감을 칠한다는 건 어쩌면 기적에 가깝다. 특히 한순간 빛을 잃은 화가라면.

그럼에도 기적은 일어난다. 멕시코 출신 화가 마뉴엘 솔라노의 경우다. 미국의 대표적 현대미술관 구겐하임이 작품을 영구소장하며 이 30대 젊은 작가에게 애정을 쏟고 있다는 평가나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별을 바꾼 트랜스젠더란 사실보다 놀라운 건 그가 시각장애 화가란 점이다. 서울 삼청동 페레스 프로젝트에서 열리고 있는 국내 첫 개인전 ‘파자마’(Pijama)엔 상식을 뒤집은 회화 작품들이 걸려있는 셈이다.

그가 시각을 잃은 건 10여 년 전이다. 멕시코시티에서 미대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에 나서려던 2014년, ‘사람면역결핍바이러스’(HIV) 합병증으로 눈이 멀었다. 자신이 배우고 쌓아온 예술세계가 한순간에 무너지자 파괴적인 감정에 휩싸여 붓을 휘둘러 봤지만 이내 좌절했다.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는 선은 어긋났고 배치나 대칭, 길이도 일일이 확인하며 완벽을 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통제되지 않는 붓 대신 손을 캔버스에 가져다 댄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평생 열정을 쏟았던 그림을 놓을 수 없던 그는 ‘시각’ 대신 ‘촉각’에 의지해 새로운 그림 세계를 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업 방식은 독특하다. 틀에 매지 않고 벽에 펼친 캔버스에 핀이나 못 등으로 윤곽을 잡고, 이를 연결해 만든 선을 따라 손끝에 묻힌 물감으로 색을 입힌다. 지난달 30일 전시장에서 만난 솔라노는 “눈이 보이지 않으니 캔버스에 못을 꽂아 전체적인 아우트라인을 잡는다”며 “손으로 터치하면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이런 노력도 한계가 있어 때때로 보조작업자의 도움을 받지만 대체로 혼자서 작업을 마치는 편이다.

그림의 소재는 눈이 멀기 전까지의 경험들이다. 자신의 유년시절부터 가족, 친구, 즐겨보던 영화, 여행지나 음식 등 어둠 속에 쌓인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기억들이다. 신작 ‘Mi Primer Beso’(나의 첫 키스)는 어린 시절 가장 친한 친구와 처음 입맞춤한 순간을 그렸다. 또 다른 신작이자 표제작인 ‘Pijama’(파자마)도 환한 웃음을 짓는 3세의 솔라노 자신의 사진이 기반이다.

이런 작품활동이 가능한 건 솔라노가 단편적인 기억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포토그래픽 메모리’(Photographic Memory)를 가졌기 때문이다. 화랑 관계자는 “십수 년 전의 기억을 끄집어내 그린 그림인데 당시 찍은 사진과 비교하면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며 “사진을 찍듯 기억을 축적하는 능력이 탁월한 경우가 있는데 작가가 그런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를 두고 솔라노는 “어린 시절 수줍음이 많아 탐구하고 관찰하는 걸 좋아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나쁜 기억이 있다면 그림에 투영된다”면서 “스스로 가지고 있는 마음가짐이라면 기쁘고 좋은 기억을 떠올리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했다. 전시는 내년 1월 14일까지.

유승목 기자 mok@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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