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이후 쿠데타가 불가능한 이유...현역 사단장이 말한 5가지
12·12 군사반란 막을 기회 10번
쿠데타(coup d'etat). '국가에 대한 일격'을 뜻하는 프랑스 말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군부가 일으킨 대표적인 쿠데타 또는 군사 반란은 5·16과 12·12다. '두 사건' 이후 반란 주동자는 모두 최고 권력에 올라 '군사 정권'을 탄생시켰다. 1979년 12·12 군사 반란 이후 40년 이상 지난 한국 사회에서 과연 쿠데타는 가능할까?
1979년 12월 12일, 저녁 7시부터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단 9시간의 '어이없는' 이야기. 영화 '서울의 봄'이 이를 담고 있다. 반란을 막을 기회는 무려 10번 정도. 그만큼 반란군의 계획은 치밀하지 못했고 오히려 '하찮은 수준'이었다. 그래도 이를 막지 못했다. 당시 국민 대부분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반란을 막을 수 있는 많은 결정권자가 책임을 회피하거나 무능했기 때문이다. '서울의 봄'을 본 관객 대부분이 속에서 뭔가 끓어오르는 느낌을 받았던 이유일 것이다.
전두환 신군부가 저지른 군사 반란은 이전에 박정희 군부가 일으킨 5·16 쿠데타와 차이가 있다. 반역사적이고 합당한 절차를 무시한 불법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들의 시선으로만 봐도 이른바 '수준 차이'가 났다. 박정희 군부가 일으킨 5·16 쿠데타 때 동원된 병력은 3,600명 정도. 60만 대군의 단 0.6%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은 '권력의 핵심'을 빠르게 장악했다. 중간에 쿠데타 계획이 밖으로 흘러 나갔지만 사망자가 없을 정도였다. 5·16을 '쿠데타'로, 12·12를 '반란'으로 급을 낮춰 명명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5·16 이후 20년 가까이 흐른 뒤에도 신군부 세력의 수준은 그만큼 낮았다. 반란 당시 '권력의 핵심'을 곧바로 장악하기는커녕 장세동 대령이 이끈 수도경비 사령부 30경비단에 집결하고도 한동안 어수선했다. 반란에 가담한다는 의사를 표명했지만 정작 병력을 동원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반란이 다 끝난 뒤에 몰려든 가담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는 의미다. 가장 안타까운 장면 가운데 하나는 9공수여단의 회군일 것이다. 전두환 측은 주요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특전사령부 1, 3, 5공수여단을 활용하려 했다. 여단장이 모두 하나회 소속이었다. 예외였던 게 바로 9공수여단. 이곳 여단장과 참모장 모두 비육사 출신이자 현재의 학사장교와 비슷한 갑종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인천에 주둔하던 9공수여단을 서울로 향하게 했다. 이들의 목적지는 반란군이 모여 있는 보안사령부와 경복궁 30경비단임이 분명해 보였다. 이를 알게 된 전두환 측은 육군본부에 '아군끼리 서울 한복판에서 살상하지 말자'며 서로 군대를 물리자는 일종의 신사협정을 제안했다. 결국 이 협정에 따라 9공수여단은 회군하게 된다. 이후 정병주 사령관은 체포되고 전두환 측은 자신들의 병력을 서울 한복판으로 집결할 수 있게 했다. 반란을 막을 수 있었던 10장면 가운데 하나다.
5·16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민주화 세력에 대한 탄압과 동시에 자신도 했던 쿠데타를 방지하는 데 힘을 쏟았다. 곳곳에 2중, 3중 장치를 해놨다. 권력을 분산시켜 경쟁시키는 방식이었다. 중앙정보부와 대통령경호실, 그리고 군(軍). 크게 3가지로 측근 권력을 나눠 견제하도록 했다.
군 안에선 보안사령부와 수도경비사령부를 두고 쿠데타를 대비했다. 영화 '서울의 봄'의 전두광과 이태신이 이끌던 바로 그 부대다. 하나는 정보를, 또 하나는 기동력을 갖추게 했다. 결국 쿠데타를 막기 위한 군의 한 축이 군사 반란을 일으킨 게 바로 12·12 사건이다. 자신들이 독점한 정보를 활용해 역으로 반란에 악용했다. 잠시 서울로 향했던 9공수여단의 출동 사실도 보안사 정보망에 걸려든 것이다.
10·26 사건 이후 최규하 국무총리는 대통령 대행에 오르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으면서 군의 공식 라인이 형성됐다. 이는 겉으로 보이는 공식 라인일 뿐이다. 실질적인 힘은 누구도 쥐고 있지 않았다. 이틈을 노린 게 바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다. 당시 국내 정보 생산은 중앙정보부와 대통령경호실, 보안사령부 등 3곳이 맡았다. 10·26으로 중앙정보부, 대통령경호실이 힘을 잃게 되니 자연스럽게 보안사령부가 국내 정보를 장악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전두환 사령관은 10·26 사건을 조사하는 합동수사본부장까지 맡으면서 모든 수사기관을 지휘할 수 됐다. 수사권을 앞세워 정적을 제거할 수 있었고 정보를 독점해 반란을 기획할 수 있었던 것이다.
노무현 정부 때인 지난 2004년 가을. <월간 중앙>에 '군은 청와대를 어떻게 보나'라는 기획 기사가 실렸다. 여기서 현역 사단장 K소장이 "이제 한국에서 군사 쿠데타는 영원히 불가능하다"며 단계별로 쿠데타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다섯 가지 이유를 댔다.
첫 번째 쿠데타 모의 단계. "휴대전화 때문에 보안 유지가 불가능하다.", "설사 모의가 성공했더라도 거사로 이어지기 어렵다, 특정 부대, 특정 집단의 일거수일투족이 사람들에 의해 순식간에 세상에 알려지기 때문이다."
두 번째 쿠데타 발발 시점. "군사를 집결시키고 장비를 앞세워 중앙무대로 치고 들어오려고 해도 교통체증 때문에 이동이 어렵다.", "과거에는 통행금지가 있었기 때문에 병력과 장비의 신속한 이동이 가능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중앙 당국의 통제가 없는 한 수도권 교통체증을 극복하기 어렵다."
세 번째 쿠데타 성공 단계.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병력과 장비를 중앙무대에 진출시켰다 해도 국민을 설득할 방도가 없다.", "과거처럼 몇 안 되는 신문사와 방송사를 접수하는 것으로 국민 동의를 구할 수 없으며 국민은 휴대전화와 인터넷으로 서로 의견과 정보를 주고받으며 쿠데타군을 응징할 것이 분명하다."
네 번째 이유. "더 이상 군이 한국 사회의 최고 엘리트 집단이 아니다.", "군사 쿠데타는 다른 사회 부문보다 군이 가장 앞서 있는 곳에서나 가능하다. 그래야 군이 명분과 힘을 가지고 다른 부문을 압도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래전부터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군 이외의 부문들이 앞서 나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 이유. "너무도 명백한 앞의 4가지 사실을, 누구보다 군이 먼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쿠데타는 더 이상 없다." 이 글이 올라온 게 20년 정도 전이니 그사이 한국 사회가 더 촘촘해지고 더 개방되어 무모한 쿠데타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
2000년 이후 쿠데타가 불가능한 가장 큰 이유는 군에 대한 문민 통제가 그만큼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취임 이후 가장 빠르고 가장 힘 있게 추진했던 게 바로 하나회 뿌리 뽑기였다. 동시에 정보기관에 대한 문민 우위도 확립했다. 이후 김대중 정부를 거치면서 군의 정치 개입 가능성이 빠르게 차단되었다. 최근까지도 군의 정치 개입과 사조직 방지를 위한 법 장치를 계속해서 쌓아가고 있다.
무엇보다 국민들이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다. 쿠데타를 기도하는 세력은 저항하는 국민을 힘으로 마냥 누를 수 없고, 반발하는 국민을 지속적으로 설득할 여유도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그렇다.
YTN 이대건 (dglee@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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