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피곤해지는 세상[편집실에서]
“더 이상 눈과 귀를 믿지 마라. 참된 것이 뭔지 물으라.”
미국 사전 출판사 메리엄웹스터가 올해의 단어로 ‘진짜의(Authentic)’로 꼽으면서 내놓은 보충설명입니다. 인공지능(AI) 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진짜와 가짜의 경계마저 흐릿해진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니 참으로 잘 고른 단어다 싶지요.
그런데 꼭 인공지능 핑계 댈 일도 아닙니다. AI와 대척점에 놓인 지위를 획득한 인간이라고 제대로 사실을 말하나요. 내편 네편으로 나뉘어 손가락질하느라 전문가의 권위, 시대의 어른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신뢰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본보기가 돼야 할 정치권 인사들은 선거구제 개편과 맞물려 당리당략, 이해득실, 공천여부에 따라 이리 재고 저리 재며 저울질하기에 바쁩니다. 그럴듯한 미사여구 뒤에 가려진 속내와 본질을 파악하느라 유권자들만 피곤한 세상입니다.
119(사우디 리야드) 대 29(부산). 2030 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에 나선 한국이 받아든 최종 성적표입니다. 이건 뭐 더블스코어도 아니고 민망, 아니 굴욕 수준입니다. 불난 집에 부채질할 일 뭐 있고, 가뜩이나 축 가라앉은 분위기에 재 뿌릴 일 뭐 있겠습니까만 짚을 건 짚어야죠. 대통령실, 외교부, 유치위, 지자체 등은 도대체 뭘 믿고 ‘불꽃 접전’, ‘막판 추격’, ‘해볼 만하다’ 등의 미사여구를 당일까지도 늘어놓았답니까. 차분히 한번 되짚어봅시다. 회원국들의 웃는 표정에 속은 겁니까, 정세 판단 능력의 총체적 부재입니까, 이도저도 아니면 판세를 읽고서도 국민을 향해 대기만극을 펼친 겁니까.
이래서야 정부의 각종 정책이 꼬인 실타래를 제대로 풀기는 풀겠습니까. 의대 증원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몇 명을 늘리겠다는 건지, 늘릴 능력은 되는 건지, 예상 가능한 부작용에 대비는 하고 있는 건지 불안하기만 합니다. 숫자 늘리는 거 좋다 이겁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춰서는 될 일도 안 된다고 다들 한목소리로 지적합니다. 가격통제는 정부가, 경영은 민간이 책임지는 현 의료시장 시스템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 밀어붙이는 정원 확대는 시장경쟁만 과열시켜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의료 서비스 이용자들에게 돌아갈 게 뻔합니다.
최근 터진 국정원 인사 파동은 더 우려스럽습니다. 엑스포 유치 과정에서 드러난 판세 포착과 정보 분석 실력으로 미뤄 정부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을 일도 아니지만, 드러난 양상만 봐도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수장 자리를 비워놓고 직무대행 체제로 운영하면서 사태가 잠잠해질 때까지 일단 뭉개고 보는 현 정부의 인사 스타일이 거의 시그니처로 자리 잡을 판입니다. 보건복지부 장관이 그랬고, 검찰총장이 그랬고, 교육부 장관이 그랬고, 여성가족부 장관이 그랬지요. 하다 하다 이번에는 국정원장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마저 이리 요지경이니 심연은 어떠할지, 이래저래 어수선하기만 한 연말입니다.
권재현 편집장 janew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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