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용]서민을 은행 종노릇 시킨 건 누구인가

박용 부국장 입력 2023. 12. 5. 23:48 수정 2023. 12. 8.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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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남발, 가계부채 실책이 은행 배 불려
횡재세, 상생금융 공세는 책임 회피 꼼수
박용 부국장
“이젠 땅에 떨어진 은행을 주워 가도 세금을 내라는 건가.” 서울시청 근처 은행나무에 붙은 정당의 ‘은행 횡재세’ 현수막을 본 한 시민이 농담처럼 말했다. 은행이 초과 이익을 거두면 추가로 세금을 부과하자는 ‘은행 횡재세’ 개념은 그만큼 낯설다. 은행(銀行)을 은행(銀杏)으로 오해한 시민이 정치권의 ‘여의도 사투리’엔 조금 어두울지 몰라도 ‘횡재세(windfall tax)’ 개념은 훨씬 잘 이해하고 있다.

‘windfall(횡재)’은 바람에 떨어진 과실이라는 뜻이 있다.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은행을 횡재세와 연결시킨 건 상식에 부합한다. 유럽의 횡재세 개념도 비슷하다. 원유가 콸콸 쏟아지는 유전을 소유한 정유회사가 갑자기 유가가 올라 큰돈을 벌면 우연히 횡재한 거니 추가로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논리다.

하지만 중동에서 원유를 사다가 정제해 석유제품을 판매하는 한국의 정유사들의 사정은 다르다. 금융당국이 대출과 사업 규제를 틀어쥔 한국 은행들의 이자 수익이 우연히 떨어진 낙과와 같은지 따져봐야 할 게 많다.

첫째, 은행 이자 장사의 책임 소재다. 이자 수익의 근원은 대출이고, 대출 규제는 당국이 쥐락펴락한다. 언젠가부터 서민과 청년 대책엔 정책 대출도 빠지지 않는다. 은행의 ‘횡재’가 문제라면 국내총생산(GDP)보다 많은 가계빚을 풀어 은행을 배불린 역대 정부와 여야 정치권의 ‘대출 포퓰리즘’ 책임도 반드시 함께 물어야 한다.

둘째, 한국 은행이 이자 장사에 매달리게 한 규제 환경이다. 은행은 이자 외의 수수료 수입을 위해 주가연계증권(ELS) 등 투자 상품을 판매한다. 그러다가 투자자 손해가 생기면 불완전 판매 논란이 불거지고, 은행이 손실을 떠안는 일이 되풀이된다. 이번에도 금융감독원은 고령자에게 ELS를 판매한 은행 탓부터 했다. 단지 고령자에게 판매한 게 문제라면 세계적 투자자인 93세의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에게 판매한 투자 상품도 불완전 판매 논란을 피할 수 없다. 감독당국은 그간 뭐했나. 되풀이되는 불완전 판매 논란이 해소되지 않으면 은행의 ‘이자 장사 중독’은 횡재세로도 막지 못한다.

셋째, 은행 이자 수익은 ‘무위험 횡재’가 아니다. 당국이 연장해준 대출 만기가 언젠가 돌아오고 대출자가 빚을 갚지 못하면 은행 손실이 커질 텐데 어디까지를 초과수익으로 볼 건가. 지금은 횡재세를 걷고 그땐 세금으로 손실을 채워주겠다는 건가. 독일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의 클라우디아 부흐 부총재는 지난달 “지금은 은행의 회복 탄력성이 가장 중요하다”며 전년 동기 대비 3배 이상의 수익을 올린 독일 은행들에 충당금을 더 쌓으라고 요구했다. 정치적 횡재세보다 금융적인 접근이다.

횡재세 대신 ‘대출 금리를 깎아주자’는 당국의 상생금융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은행이 이자 장사로 돈을 벌었다면 예금이자를 낮게 줬거나 대출이자를 너무 높게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금융당국은 대출금리를 자극할까 걱정해 은행들에 “지나친 수신 금리 경쟁을 자제하라”고 한쪽 편을 들었다. 예금자에게 줄 이자를 줄여 대출 이자를 낮춰주더니, 다시 은행이 번 수익을 빼서 대출자의 금리를 깎아주는 게 상생금융은 아니다. 고금리로 신음하는 서민을 위한 금융지원은 필요하지만 예금자 부담으로 대출자의 손실을 사회화하는 건 공정하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은 고금리로 어려운 소상공인·자영업자들을 보며 “은행의 종노릇을 하는 것 같다”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서민이 은행 종노릇을 하는 일을 근본적으로 막으려면 그간 방만하게 관리한 세계 최고 수준의 가계부채부터 줄여야 한다. 자영업자들이 은행 빚을 내지 않고 신나게 장사할 수 있게 괜찮은 일자리와 경제부터 살려야 한다. 새로 짜이는 윤석열 정부 ‘2기 경제팀’이 은행 탓만 해선 할 수 없는 일이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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