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등급[정도언의 마음의 지도]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2023. 12. 5.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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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놀랐습니다. 오래전에 미국에서 소고기를 사러 갔습니다. 전혀 몰랐던 일입니다. 진열된 소고기에 등급이 있다니! 그때까지는 그냥 먹기만 했었지요, 고급, 중급, 하급이 있다고는 상상한 적이 없었습니다. ‘등급 외’는 물론 전시에 빠졌을 겁니다. 가격 차이가 커서 고민을 했습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정신분석은 언어가 수단인 점에서 약물, 수술, 방사선 등으로 하는 치료와 뚜렷하게 구분됩니다. 분석가 자격을 얻으려면 국내외에서 인정하는 기준에 따라 수련해야 합니다. 문헌 세미나로 이론을 익히고, 지도를 받으면서 분석 실제를 공부하는 것은 물론이고, 스스로 여러 해 동안 교육분석가에게 분석을 받으면서 자신의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치료를 경험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말이 지니고 있는 힘이 오묘하다는 사실을 속속들이 깨달아야 합니다. 말로만 이루어지는 장기간의 수련 과정에서 성숙해지는 효과를 스스로 얻으면서, 그 과정을 세밀하게 살피게 됩니다. 분석이란 아무 말이나 주고받는 작업이 절대로 아니며 분석가로서 듣기와 말하기를 제대로 하게 되려면 오랜 기간 끊임없이 다듬어야 한다는 점을 머리로, 마음으로 자각하게 됩니다.

‘말로 하는 치료’인 정신분석에서 ‘아’와 ‘어’가 다르다는 경험을 자격을 얻은 이후에도 수없이 하게 되면서 분석 공부가 평생의 과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살펴보면 이미 수십 년 전에 저명 분석가의 위치에 오른 고령의 분석가들도 공부를 전혀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겪어보면, 맥락이 같아도 어떤 단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또는 분석가가 하는 말의 어조에 따라 피분석자의 반응이 전혀 달라집니다. 캐묻는 것으로 느끼면 마음이 저항하면서 침묵할 것이고, 아무리 충실한 해석을 준비해도 서서히 단계를 밟지 않고 갑자기 꺼내면 뜬금없이 들려서 피분석자의 마음에 전혀 파동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그러니 정신분석은 말이라고 하는 인간만이 지닌 기능을 기술적으로 활용하는 예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분석 과정에서 마음의 진실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다루려 한다는 전제를 두 사람이 모두 지켜야 합니다. 진심이 없는, 교묘한 ‘말장난’을 해서는 효과를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말은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나타냅니다. 재치 있게 약삭빠른 말로 잠시 곤란한 상황을 피할 수는 있으나 자신의 말 뒤에 모습을 감추고 있는 의도를 영원히 가릴 수는 없습니다. 태도를 바꿔서 곤란한 질문에는 침묵한다고 애써도 소용없습니다. 지켜보는 상대편이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면 방탄막으로 잠시 쓰고 있는 침묵의 의미조차 넓고 깊게 해석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는 능력은 진화의 산물입니다. 원시인 조상의 소리내기가 말하기로 되는 데는 아주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니 말하는 능력은 인간을 비인간과 구분하는 결정적인 특성이며 보존하고 발전시켜야 할 소중한 가치입니다. 인간은 어울려 살아가야만 하니 자신이 하는 말에 소속 집단이 지향하는 바를 알게 모르게 흡수해서 간직합니다. 예를 들면, 분석 시간에 피분석자가 분석가에게 하는 말들에는 부모의 말들이, 생각들이 묻어 나옵니다. 분석가는 그 묻어 나온 말들을 기반으로 피분석자를 더 이해하고 이해한 바를 말로 해석해서 돌려줍니다.

상스러운 말들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어 논란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욕설과 악담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그런 의도로 그렇게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역설적인 것은 사람을 사람이 아닌 존재로 부르면서 모욕하려는 악의적인 의도가 무의식의 관점에서는 스스로가 사람이 아니라는 어리석은 고백으로 들린다는 점입니다. 특정 단어를 반복해서 공공장소에서 즐겁게 언급한다면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이 그 단어에 퇴행적으로 고착되어 있다는 사실을 본의 아니게 다중에게 공개적으로 스스로 전달하고 있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그 사람이 선택한 그 특정 단어는 소속한 집단의 문화를 대변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 순간 그 자리에 있었지만 침묵하는 사람들 역시 이런저런 이유로 해야 할 때 말을 안 하거나 못 하는 퇴행적 행동을 보이는 겁니다.

‘욕설’의 겉은 단순하게 보이지만, 속으로 들어가면 복잡합니다. 사전에 실린,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익숙한 평범한 단어도 누군가가 욕망과 악의를 더해 맥락을 만들어내면, 그 단어가 갑자기 싸움에 쓸 도구로 바뀝니다. 말이 존재하는 진화적 의미는 나와 남을 이어주는 것이나, 남을 공격해 제거하려는 목적으로 구사하는 겁니다. 마음을 끄는 말이 아니고 험악한 말이니, 숙성보다는 부패를 계속하면서 ‘세균’을 퍼뜨리고 환경을 오염시킵니다. 욕설하는 행위는 조금만 미리 생각해도 스스로 방지할 수 있지만 욕망에 사로잡혀서 배출이 급하면 멈추기 어렵습니다. 부패된 욕망의 배출 행위를 사회적 행위로 이럭저럭 받아들인다면 우리 사회 전체가 어두워집니다. 소고기 등급처럼 인간의 소중한 가치인 말에도 등급을 매겨야 합니다. 문턱을 넘으면 엄정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관계로 덮으려 한다면 같이 오염될 위험을 달갑게 받아들여야 할 겁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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