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아직 오지 않았고 끝끝내 오지 않을 수 있지만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게 우리 삶
68편의 시 묶어 5년 만에 신작 발표
지속적으로 써오던 ‘북방 시’ 외에도
지구와 우주로 확장된 세계관 표현
집필은 취미 아닌 생을 걸고 하는 일
소리 없이 우는 이들의 향기 같은 것
러시아 연해주 하바롭스크 아무르 강가 ‘죽음의 계곡’에 섰다. 최초의 조선인 볼셰비키로 알려진 김알렉산드라가 처형된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쌀쌀한 바람은 100년 전 바로 그날로 이끌었다. 그러니까 1918년 9월, 백군은 처형을 앞둔 그녀의 눈에 감긴 붕대를 풀어줬다. “조선인이 무슨 이유로 러시아 내전에 참여했느냐”는 백군의 물음에, “조선 인민이 러시아 인민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해야만 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고 답한 그녀였다.
두 번의 연해주 답사를 거치면서 김알렉산드라를 노래한 두 개의 시가 나왔다. ‘아무르강의 붉은 꽃’과, ‘김알렉산드라 소전’이었다. “연해주와 시베리아 대륙 마을마다/ 억압받는 이들을 위한/ 자유의 씨앗을 뿌리고/ 세상에서 가장 가련하지만/ 가장 사랑하는 겨레의 독립이라는/ 기적의 꽃을 피우고자 했던/ 그것이 이념이고 주의였고 전부였던/ 서른넷의 붉은 여인은/ 시베리아 붉은 대륙을 가르며/ 붉게 더 붉게 흐르는/ 아무르강 가장 깊은 곳에 잠들었다/ 골고다 언덕 예수의 최후처럼”(‘김알렉산드라 소전’ 부문)
시인은 북방을 종횡무진 더듬은 뒤 지구적이고 동시대적인 성찰로도 나아간다. 시 ‘넘버 스리’는 1969년 달에 최초로 착륙한 아폴로 11호에 탑승했음에도, 닐 암스트롱이나 버즈 올드린과 달리 지구와의 교신을 위해 달의 표면을 밟지 못한 조종사 마이클 콜린스 이야기다.
“나는 넘버 투를 넘보는 넘버 스리가 아니에요/ 자장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하지도/ 배신을 불사하는 불멸의 불사조를 꿈꾸지도 않았어요/ 더욱이 내 아내는 시를 쓴다고 랭보와 바람이 나지도 않은 걸요//…우리 세 사람은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나기였어요/ 우리는 각각의 삶을 살았고/ 나는 그날 이전에도 이후에도 단 한 번도 넘버 원이 아닌 적이 없어요/ 나는 최선을 다한 내 생의 영웅이었으니까요”(‘넘버 스리’ 부문)
―시는 구분 짓고 가치를 부여하는 기존 인식에 대한 전복으로 읽히는데.
“사람들은 늘 넘버 원만 기억하고 넘버 스리를 잊거나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마이클 콜린스를 통해 넘버 스리처럼 보이지만 다른 이들이 못 본 것을 봤다고, 넘버 스리였기 때문에 한 번도 불행한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1등만 지향하는 세상과 통념을 전복하고 싶었다. 실제 삶을 봐도 가장 많이 알려진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불행했지만, 콜린스는 가장 순탄한 삶을 살았다.”
시집 곳곳에 여로에서 경험했거나 깨달은 사유를 펼쳐 보이기도 한다. 어느 날 지친 걸음을 이끌고 한 산사의 미륵전에 들어섰다가 만난 사람들의 꿈과 희망, 소망, 그리고 사유도 담겨 있다.
“타박타박 지친 걸음으로/ 미륵전에 들었다/ 언젠가는 올 것이나 당대에는 결코 오지 않을/ 미륵을 기다리고 기다리며/ 한 시대를 건너고 한 생을 건넜을/ 뭇사람들의 그림자/ 키 큰 미륵불을 모신 삼층 법당에 어른거린다/ 그 검은 그림자들 사이에서/ 오기로 했고 올 것이고 오고야 말/ 그러나 아직 오지 않은/ 어쩌면 끝내 오지 않을/ 너를 기다리는/ 산사에 봄눈 분분히 흩날린다/ 기다린다는 것은 비워두는 것이고/ 비워둔다는 것은 기다린다는 것일진대/ 담박하게 너른 마당을 홀로 지켜온/ 늙은 산사나무가 기다리는 이는 누구일까/ 눈 수북이 쌓인 가지마다/ 맑은 눈물 똑똑 흘리면서”(‘미륵을 기다리며’ 전문)
―왜 사람은 미륵을,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인가.
“어느 절이었는지 모르겠지만 3층 법당에 미륵전이 있었다. 법당에 들어가는 순간 문득 미륵을 희망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지금은 희망이 없지만 언젠가는 희망이 올 것이라는 바람, 아직 오지 않았고 어쩌면 끝내 오지도 않을, 그럼에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게 우리 삶 아닌가. 안 왔고, 안 올 것이고, 끝끝내 안 오겠지만, 그래도 미륵을 기다리는 게 우리 의지일 것이다. 제 시적 가치관이기도 하다.”
“독자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되, 문학 작품은 적어도 한 시대나 한 집단의 삶의 지형도 같은 것이어야 된다. 시대 또는 집단의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이었고, 그때 살았던 사람들의 정신이나 사유가 어떤 것이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제가 시를 쓴다는 것은 마치 김일의 박치기 같은 것이다. 가장 잘하는 필살기지만, 동시에 가장 하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취미가 아니라 한 생을 걸고 하는 것이다.”
오전 5시 45분쯤 일어나 한 시간 정도 운동으로 하루를 여는 시인 곽효환은 철저한 이중 생활자다. 즉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중에는 한국문학번역원장으로 맹렬하게 살아가고, 주말엔 시인으로 변신해 조용히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물론 번역원장 처음 8~9개월 동안 아예 시 한 편도 못 쓸 정도로 바빴지만. 마지막까지 번역원장 직무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그는 한 명의 시인으로 어딘가를 걷고 더듬고 있을 것이다. 세상의 소리 없이 울다간 모든 사람들을.
“매화 향기 남은 자리에/ 벚꽃 분분히 날린 다음/ 모가지를 떨군 동백꽃/ 홍건히 잠겨 흘러가는 실개울/ 수척한 빈산 노거수 그늘에 들어/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을 더듬는다”(‘소리 없이 울다간 사람’ 중에서)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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