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월회의 행로난] ‘사회적 유령’ 제조법

기자 입력 2023. 12. 5.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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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이불론(存而不論)”이라는 말이 있다. 멀쩡히 존재함에도 그에 대하여 거론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면 엄연히 존재하는 그것이 현실 속에선 없는 것이 된다. ‘사회적 유령’ 만들기라고나 할까, 암튼 전근대 시기 한자권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줄곧 있어왔다.

이런 식이었다. 국가에 커다란 환란이 있어도 조정의 신하들은 이를 임금 앞에서 일절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사회 속 현실에선 한창 벌어지고 있는 환란이 군주의 현실 속에선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누군가 입바른 소리를 하면 아예 그를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없는 사람으로 만든다. 살아 있음에도 사회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유령으로 치부한다.

때로는 이를 뒤집어 현실 호도의 쏠쏠한 수단으로도 활용했다. 존이불론을 뒤집으면, 그러니까 없는 사실도 작정하고 거론하면 있는 사실로 둔갑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만 그러했음도 아니다. 정치인 등 공인의 범죄를 다루는 언론의 태도만 봐도 그러하다. 연일 대서특필하며 몰아가면 없는 죄도 있게 되고 작은 죄는 큰 죄가 된다. 반면 큰 죄라도 작심하고 다루지 않으면 작은 죄로 치부되거나 없던 죄로 둔갑한다.

여기서 존이불론은 아Q의 ‘정신승리법’과 당당하게 연대한다. 중국 현대문학의 대문호 루쉰은 대표작 <아Q정전>에서 주인공 아Q의 위대한(?) 정신승리법을 펼쳐냈다. 아Q는 노인인 자신에게 돌팔매질을 해대는 동네 아이들을 정신승리법으로 인간 아닌 것들로 삭제해버린다. 인간이라면 노인에게 돌을 던지며 유쾌해할 리 없으니 자신에게 돌 던진 아이들이 인간일 리 없다는 논리였다. 그러고는 인간도 아닌 것들에게 돌 맞았다고 화내는 건 온당치 않다며 툴툴 털고 일어난다. 루쉰은 근대에 들어서도 쌩쌩하게 살아남은 존이불론을 아Q의 정신승리법으로 탈바꿈시켰던 것이다.

사실 개인 차원에서는 존이불론의 태도가, 아Q의 정신승리법이 요긴할 때도 있다. 그러나 국가 간 이해득실이 첨예하게 부딪치는 국제무대에선 그야말로 무용지물이다. 이는 돌팔매질한 아이들조차 익히 알 수 있다. 동화 속 벌거숭이 임금님은 궁궐에선 멋지게 차려입었다고 여겨질 수 있어도 그 바깥에선 그저 천둥벌거숭이일 따름이다. 이는 돌 맞은 아Q라도 익히 알 수준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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