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게손’ 피해자 “내가 안 그렸는데…날 공격해 놓고 사과조차 안 해”
“은근슬쩍 스리슬쩍 페미 계속” SNS 빌미돼
이름·카톡·블로그 공개돼…남초사이트서 공격
회사쪽 해명에도 공격 계속…경찰에 고소 검토
“저는 논란이 된 (집게 손 모양) 장면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사과조차 하지 않고 있어요.”
넥슨의 게임 ‘메이플스토리’ 홍보영상에 남성을 비하할 목적으로 특정 손가락 모양을 넣었다며 남초 커뮤니티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은 애니메이터 ㄱ씨는 5일 한겨레와 만나 “집게 손 모양을 절대로 그려넣지 않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ㄱ씨는 넥슨의 외주를 받아 ‘메이플스토리 엔젤릭버스터(엔버)’ 홍보영상을 제작한 ‘스튜디오 뿌리’(뿌리)의 직원이다. 지난 30일 회사 쪽 공개로 남초 사이트에서 ‘문제의 장면’으로 지적받은 장면을 그린 게 ㄱ씨가 아니란 사실이 확인됐지만, ㄱ씨를 향한 비판과 의구심은 여전한 상황이다.
“무슨 말을 하든 안 믿는구나 싶었어요. ‘일베’(일간베스트의 약자로, 여성혐오를 일삼는 남성들을 일컫는 표현)가 자신들의 상징인 손가락 모양을 상업 이미지에 넣고 낄낄거리니까, 나도 그런(집게 손가락을 의도적으로 넣는) 행동을 했을 거라고 섣불리 생각한 모양인데, 전 그런 그림을 그린 적이 없어요.”
ㄱ씨는 지난 1일부터 법률자문을 하는 범유경 변호사(법무법인 덕수)와 함께 지난 1일부터 ㄱ씨에 대한 욕설과 비방, 개인정보 유포 등 사이버불링 사례를 제보받아 고소를 검토하고 있다.
5년차 애니메이터인 ㄱ씨는 엔버 영상에 ‘원화맨’(원화 담당자)으로 참여했다. 대략적인 캐릭터의 모습과 움직임을 연출한 콘티가 완성되면, 구체적인 화면 구성을 그리는 것이 ㄱ씨의 역할이다. ㄱ씨는 여성 캐릭터 엔버가 회전하면서 변신하는 3∼4초 장면의 원화를 그렸다. ㄱ씨는 “메이플스토리는 우리 회사에서 오래 전부터 맡아 온 작업물”이라며 “이번에는 특히 캐릭터 엔버의 귀여움을 살리기 위해 회사 직원들이 모두 열심히 노력했다. 그렇게 중요한 영상에 집게 손을 일부러 넣었겠냐”고 말했다.
몇 달에 걸쳐 걸쳐 작업해온 영상을 두고 ‘혐오 논란’이 벌어질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난달 25일 밤 10시께, 남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ㄱ씨가 영상에 의도적으로 집게 손을 그려넣었다는 글이 올라왔다. “은근슬쩍 스리슬쩍 페미 계속해줄게.” 지난 3월 ㄱ씨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이 근거였다.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공격받고, 일자리에서 잘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조적인 뜻으로 올린 글”이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ㄱ씨의 에스엔에스 등에는 욕설 메시지 등이 이어졌다. 뿌리의 장선영 대표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다. 장 대표는 “조금 있으면 가라앉을 것”이라며 ㄱ씨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원청사인 넥슨은 그날 밤 해당 영상을 비공개 처리하고, 다음날 새벽 사과문을 올렸다. “넥슨과 함께 오래 일해왔기 때문에 믿고 있었는데…혼란스러웠다.” ㄱ씨는 소식을 전해듣고 바닥에 주저 앉았다고 했다.
남초 커뮤니티의 공격은 갈수록 심해졌다. ㄱ씨의 이름과 카카오톡 아이디, 블로그 주소까지 모두 공개됐다. ㄱ씨는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카카오톡 메시지를 받기도 했다. “어떤 내용이 있을까 두려워 카톡창을 눌러보지도 못했어요. 남초 커뮤니티에 계속해서 비방글이 올라오고 있을텐데 찾아보지 않고 있어요.” ㄱ씨는 “모두가 날 싫어하는 것 같았어요. ‘작업물에 타인을 조롱하는 표현이나 넣는다’고 믿고 있으니까 마음이 아팠어요. 진짜로 안 했는데…”라고 말했다.
ㄱ씨는 이 일이 일어난 뒤로는 더는 국내 업체와는 일하지 못하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실제 회사에 퇴사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뿌리가 지난달 27일 ‘ㄱ씨가 퇴사할 것’이라는 입장문을 올렸다가 다시 삭제한 것도 이런 맥락 속에서 벌어진 일이다. ㄱ씨는 “퇴사한다고 입장문에 쓴 것이 거짓은 아니다. 회사가 공격을 받는다면 내가 퇴사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며 “이후 장 대표가 ‘퇴사한다는 입장을 번복하고 며칠만 더 기다려보자’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 이후 불안 증세와 스트레스로 인한 기억 능력 저하, 식욕 저하, 수면 장애 등에 시달리고 있다. ㄱ씨는 현재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그는 남초 커뮤니티가 ‘남성혐오’의 상징이라며 집게 손 모양 찾기에 나선 것을 두고 “허상”을 쫓고 있는것이라고 말했다. “집게 손은 (자연스럽게 나온) 일상적인 손 모양 중 하나일뿐, 아무 상징성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애니메이션에서는 주먹을 펴는 장면을 그리다보면 나올 수밖에 없는 손 모양”이라며 “한 장면만 캡처해서 이상하다고 하는 것은 애니메이션의 원리에 대해 하나도 모르고 하는 얘기”라고 말했다. ㄱ씨는 “캡처한 애니메이션 한 장면을 갖고 ‘페미’라고 주장하는, 말도 안 되는 음모론을 들어주기 시작하면 사회에 사상검증이 더 심해질 것”이라며 “게임계 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에서 사상검증이 벌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ㄱ씨는 ‘페미니즘=남혐’이라고 싸잡아 비판받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한마디했다. 그는 “‘남성 다 죽어라’ 하는 식의 시위는 페미니즘이 아니다”라며 “성차별에 문제 의식을 갖고 남녀 모두 같이 잘 살자고 하는 것이 페미니즘”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건) 인간 존엄의 문제”라며 “페미니스트가 낙인이 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채윤태 기자 cha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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