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 앞에서 무력화된 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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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지인 한겨레21에서 일할 때 가끔 밤새워 기사를 쓰곤 했다.
보통 원고지 24매나 32매 분량인 주간지 기사를 쓰려면(신문은 보통 10매 미만이다) 더 깊게 많이 취재해야 했고, 장문의 기사를 쓰는 것도 버거워 해가 뜰 때까지 기사를 붙들고 있기 일쑤였다.
좀더 나은 사회로 내딛는 한 걸음이 쿠팡 앞에서 무력화돼도 되는지 물을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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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한겨레 프리즘] 이완 | 산업팀장
주간지인 한겨레21에서 일할 때 가끔 밤새워 기사를 쓰곤 했다. 보통 원고지 24매나 32매 분량인 주간지 기사를 쓰려면(신문은 보통 10매 미만이다) 더 깊게 많이 취재해야 했고, 장문의 기사를 쓰는 것도 버거워 해가 뜰 때까지 기사를 붙들고 있기 일쑤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현관문 너머에서 ‘툭’ 하는 소리를 들었다. 아침 7시 전 택배 상자를 놓고 가는 소리였다. 거창한 ‘밥벌이의 고단함’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군가 나처럼 이 새벽에 일하고 있음을 알리는 그 소리에 잠깐 위안을 얻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 10월26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 나온 대화는 뒤통수를 ‘탁’ 치는 느낌이었다.
“새벽 노동이 왜 문제가 되는 건지 알고 계시나요? 똑같은 노동시간인데 무슨 문제냐 하는, 설마 그런 생각 안 하시죠?”(이학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저희 쿠팡 새벽 노동에 종사하는 배송직들의 근로여건이 그렇게 열악하다고 보지는 않습니다.”(홍용준 쿠팡로지스틱스서비스 대표)
“새벽 노동이 일상 노동하고 차이가 있냐 없냐 그걸 묻는 거예요.”(이 의원)
“그건 개인마다 조금 생각이 다를 것 같습니다.”(홍 대표)
그보다 조금 앞선 10월13일 새벽 경기 군포시 한 빌라 복도에서 택배 상자를 나르던 쿠팡 퀵플렉스 노동자가 쓰러진 채 발견됐다. 쿠팡 퀵플렉스는 쿠팡의 물류배송 자회사인 쿠팡로지스틱스서비스(CLS·씨엘에스)에 간접고용돼 일하는 배송 직군이다. 이른바 특수고용노동자다. 쿠팡엔 직접고용 배달노동자가 7천~8천명, 퀵플렉스 노동자가 1만3천명에 이른다. 여기에 전국 30여 곳 물류센터에서 밤새 쉬지 않고 일하는 이들도 있다.
홍 대표는 이날 “(기사들이) 원하지 않는 새벽 배송을 하는 경우는 없고, 대부분 새벽 배송을 다양한 이유로 좋아하는 기사분들도 있기 때문에 시간을 규제한다든가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조금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야간 노동과 장시간 노동의 위험성은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2007년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암연구소(IARC)는 생체리듬을 교란하는 야간 노동을 다이옥신보다도 한 단계 더 높은 발암 요인이라고 보고했다. 24시간 일주기 리듬이 교란되면 수면장애, 우울증, 심혈관질환 같은 질환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의학 전문가들의 의견도 있다.
산업계에서도 야간 노동을 없애기 위한 논의가 있었다. 국내 대표적인 주야간 맞교대 사업장인 현대자동차 노사는 울산 공장 가동 46년 만인 2013년 ‘밤샘 노동’을 없앴다. 이제 밤 12시10분에 생산라인이 멈춘다.
또 특수고용노동자가 근로시간, 임금, 안전, 휴가 등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있었고, 택배노동자의 경우 2021년 ‘택배 과로사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통해 한발 더 나아갔다.
쿠팡은 그동안 이런 논의에서 떨어져 있었다. 2021년 사회적 합의 때도 씨엘에스는 참여하지 않았다. 쿠팡은 야간 노동 중 숨진 퀵플렉스 노동자가 보도되자마자 “고인은 쿠팡 근로자가 아닌 전문배송 업체 소속 개인사업자”라는 자료부터 냈다. 함께한 노동자의 죽음에 안타까워하거나 사과하기보다 소속 노동자가 아니라며 밀어내는 게 먼저였다.
보통 정보기술(IT)에 기반해 혁신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은 ‘사회문제 해결’을 사명으로 내세울 때가 많다. 그런데 이들 기업 가운데 강한승 쿠팡 대표나 홍용준 대표처럼 법조인 출신이 대표를 맡는 곳이 적지 않다. 이들에게 맡겨진 역할이 기존 규제와 사업자의 반발을 법적으로 물리치고, 사회적인 책무를 법적으로만 접근해 면책받고 빠져나가는 ‘해결’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좀더 나은 사회로 내딛는 한 걸음이 쿠팡 앞에서 무력화돼도 되는지 물을 때가 됐다.
w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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