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방큰돌고래가 여는 인간-지구 공존의 길
사람은 사물이 사물로 자립하는 시대에도 여전히 세계의 중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때의 중심은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의 지배자라는 의미의 중심이 아니라, 그 근대적 주체의 오만을 비워낸 ‘빈 중심’이다. 인간이 빈 중심으로 서서 만물을 이웃으로 모시는 그때 인간은 근대의 몽매에서 깨어날 것이다.
조선 후기 ‘규방문학’이 낳은 작품 중에 ‘조침문’이 있다. 남편을 일찍 보내고 바느질로 생계를 이어오던 유씨 부인이 아끼던 바늘이 부러지자 그 애통한 마음을 담아 쓴 추도문이다. “너를 얻어 손 가운데 지닌 지 우금 이십칠년이라. 어이 인정이 그렇지 아니하리오. 슬프다.” 유씨 부인의 문장은 피붙이를 떠나보낸 듯 절절하다. “아야 아야 바늘이여, 두 동강이 났구나. (…) 한 팔을 베어낸 듯, 한 다리를 베어낸 듯, 아깝다 바늘이여, 옷섶을 만져보니 꽂혔던 자리 없네.” 바늘이라는 하찮은 물건도 오래 익혀 쓰다 보니 깊은 정이 붙어 쉬 놓아줄 수 없다. “네 비록 물건이나 무심치 아니하면, 후세에 다시 만나 평생 동거지정을 다시 이어, 백년고락과 일시생사를 한가지로 하기를 바라노라.”
이 글을 바늘을 의인화하여 쓴 재치 있는 수필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이 글에는 인간과 사물 사이 보이지 않는 유대에 대한 믿음이 있던 시대의 생활 감각이 배어 있다. 사물에도 삶이 있고 마음이 있다는 이 믿음은 지나간 시대의 한갓 어리석은 믿음인가. 냉철한 과학적 사고로 극복해야 할 낡은 관념일 뿐인가. 20세기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는 다르게 생각했다. 근대 과학 이성이 키운 우리의 합리적 사고를 거슬러 이 오래된 믿음을 되살려내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과제라고 보았다. 그런 생각을 밝힌 곳이 1949년 ‘사물’이라는 제목으로 브레멘에서 한 강연이다.
하이데거는 ‘단지’라는 아주 흔한 물건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단지는 물을 담거나 술을 담는 데 쓰인다. 포도주를 예로 들어보자. 포도주는 포도나무 열매로 빚는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려면 하늘과 땅이 서로 힘을 모아야 한다. 하늘은 빛을 주고 땅은 양분을 준다. “포도주라는 선물에는 그때마다 하늘과 땅이 머무르고 있다.” 포도주는 사람의 목을 축이고 만남의 흥을 돋우는 데 쓰인다.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데도 쓰인다. 이때 하이데거가 말하는 ‘신들’은 자연 만물에 깃든 성스러움을 뜻한다. 단지는 포도주라는 선물을 담음으로써 하늘과 땅, 사람과 신들을 하나로 모은다.
하늘과 땅과 사람과 신, 이 ‘사방’의 넷이 머무는 단지를 가리켜 하이데거는 ‘사물’(Ding)이라고 부른다. 하이데거는 말의 뿌리를 파고 들어가 사물이라는 낱말에 ‘모아들임’이라는 뜻이 있음을 밝혀낸다. 독일어에서는 지금도 사물(Ding)의 고어 ‘팅’(Thing)이 ‘집회’라는 뜻으로 쓰인다. 단지는 사방의 넷을 하나로 모아들여 머물게 하는 사물이다. 단지가 모아 펼치는 사방을 하이데거는 세계라고 부른다. 하늘과 땅, 인간과 신들이 모여들어 이룬 커다란 하나가 세계다. 그 세계 안에서 인간은 다른 셋과 더불어 살아간다. 그 세계를 펼쳐주는 것이 사물이다. 사물에는 넷이 어울려 이루는 성스러움이 머물러 있다.
그러나 냉정한 과학의 눈으로 보면 단지는 그저 물이나 술을 담는 용기, 그래서 깨지면 내다 버리는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물건에는 땅도 하늘도, 사람도 신들도 모이지 않고 머물지 않는다. 과학은 옛사람들의 생활세계를 지탱해 주던 마법을 풀어 축출했다. 과학이 생활세계를 식민화하자 식민지 주민들은 소중한 것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고 믿었던 것들을 잃어버렸다. 사물은 흩어졌다. 이런 사태를 두고 하이데거는 “원자폭탄이 폭발하기 한참 전에 과학은 사물을 절멸시켰다”고 말한다.
근대 과학의 등장과 함께 열린 세계에서 인간은 인식론적 주체가 돼 모든 사물을 인식 대상으로, 다시 말해 과학적으로 분석해 파악해야 할 대상으로 삼았다. 인식은 인식에 그치지 않는다. 사물은 대상이 됨으로써 자립성을 상실하고 인간이라는 주인에게 봉사해야 할 처지로 떨어진다. 하늘과 땅, 사람과 신들이 모여들어 머물던 사물은 인간이 이용하고 개발하고 수탈할 자원이 돼 본디 모습을 잃어버린다. 사물다움이 사물을 떠난다.
이런 생각은 하이데거만의 생각이 아니다. 하이데거가 ‘사물’ 강연을 하기 두어 세대 전 한반도의 선각자도 비슷한 말을 했다.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1827~1898)이 그 사람이다. 해월은 관헌의 체포를 피해 산간벽지를 돌며 스승 최제우의 가르침을 퍼뜨렸다. 도망의 세월이 35년에 이르렀다. 그 세월 중에 해월은 스승의 ‘시천주’ 곧 ‘하늘을 모신다’는 가르침을 넓혀 하늘과 사람과 사물을 함께 높여야 한다고 얘기했다. 경천·경인·경물의 삼경 사상이다.
해월은 하느님이 천상에 있다는 통념을 거부했다. “하늘을 공경함은 결단코 허공을 향해 없는 상제(하느님)를 공경한다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을 공경함이 곧 경천의 도를 바르게 아는 길이다.” 해월은 경천을 양천(養天, 하늘을 기름)이라는 말로도 설명했다. “하늘을 기를 줄 아는 자라야 하늘을 모실 줄 안다. 하늘이 내 마음속에 있음이 마치 씨앗의 생명이 씨앗 속에 있음과 같으니, 씨앗을 땅에 심어 그 생명을 기르는 것과 같이 사람의 마음은 도에 의하여 하늘을 기르게 된다.” 하늘은 내 마음속에 있다. 내 마음속의 씨앗을 키우는 것이 곧 하늘을 공경하는 일이다.
해월은 경천에 이어 경인을 말한다. “경천은 경인으로써 그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경천만 있고 경인이 없으면 농사의 이치는 알되 씨앗을 땅에 뿌리지 않는 것과 같으니, 도 닦는 자는 사람을 섬기되 하늘과 같이 한 뒤에야 비로소 바르게 도를 실행하는 것이다.” 사람을 섬기는 것이 곧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 해월은 말한다. “사람을 공경하지 아니하고 귀신을 공경하여 무슨 실효가 있겠는가.” 사람 없이 하늘 없다. “하늘은 사람을 떠나 따로 있지 않다. 사람을 버리고 하늘을 공경한다는 것은 물을 버리고 해갈을 구하는 것과 같다.”
해월의 가르침은 경인으로 끝나지 않는다. 경천은 경물에 이르러서야 그 극치를 이룬다. “사람은 사람을 공경함으로써 도덕의 극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더 나아가 만물을 공경함에까지 이르러서야 천지기화의 덕과 하나가 될 수 있다.” 경천도 경인도 오직 경물에 이르러서야 그 도덕을 완성할 수 있다.
해월이 말하는 도덕은 유학이 가르치는 인의예지보다 훨씬 함의가 크다. 그 도덕의 근본을 찾으려면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도생지 덕축지’(道生之 德畜之)라는 말을 살펴야 한다. ‘도는 만물을 낳고 덕은 만물을 기른다.’ 해월이 말하는 도덕은 예의범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천지가 만물을 낳아 기름을 뜻한다. 그 만물 가운데 사람도 있다. 이 도덕의 지극한 뜻을 구현하려면 사람을 공경하는 것만으로는 어림없고 만물을 공경함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 해월의 삼경 사상이다.
해월의 가르침대로 도덕을 자연 만물에까지 확장하면, 사물을 보는 우리의 안목이 전혀 다르게 열릴 수 있다. 경물이 도덕의 궁극이라는 해월 사상의 참뜻을 우리는 기후위기라는 미증유의 재난에 직면해서야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다. 인간의 사물 학대가 그 끝에 이르러 사물이 더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와서야 거대한 반전이 일어나고 있다.
그 반전의 양상을 보여주는 것 가운데 하나가 멸종위기종인 남방큰돌고래에게 법인격을 주자는 운동이다. 동식물, 더 나아가 하천과 호수 같은 자연물을 자립적 권리 주체로 인정해주자는 것은 근대법 체계를 뛰어넘는 발상이다. 근대법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토대로 삼고 있다. 2003년 천성산 터널 공사를 막으려고 도롱뇽이 소송을 내고 지율 스님이 240일 넘는 긴 단식으로 함께 싸웠지만 끝내 패소했다. 도롱뇽은 근대법 체계의 벽을 넘지 못했다. 동식물과 자연물이 인격을 부여받으면 이 근대법 체계를 뚫고 사람을 후견인으로 삼아 ‘비인간’이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된다. 남방큰돌고래가 기수가 돼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지구 공생의 길을 여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사물’ 강연에서 사물이 사방을 불러들여 세계를 연다고 했지만, 결국 사물을 사물로 알아보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이 없다면 사물은 사방을 불러들이는 사물로 나타나지 못한다. 그렇게 보면 사람은 사물이 사물로 자립하는 시대에도 여전히 세계의 중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때의 중심은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고 모든 것의 지배자라는 의미의 중심이 아니라, 그 근대적 주체의 오만을 비워낸 ‘빈 중심’이다. 인간이 빈 중심으로 서서 만물을 인간의 이웃으로 받들고 모시는 그때가 인간이 비로소 근대의 몽매에서 깨어나는 순간일 것이다.
고명섭
책지성팀 선임기자. ‘하이데거 극장-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1, 2), ‘니체 극장-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생각의 요새’, ‘광기와 천재-루소에서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지식의 발견-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을 썼다. 카이로스는 때·시기·기회를 뜻하며 현재를 밝히는 순간의 섬광을 가리킨다. 카이로스의 눈으로 철학·사상·역사를 포함한 인문학을 탐사하며 우리 시대와 대화한다.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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