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플 ‘남혐 집게손가락’의 끊이지 않는 음모론[팩트체크]

이홍근·정효진·김은성 기자 입력 2023. 12. 5. 18:54 수정 2023. 12. 5.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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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가 그린 엔버 변신 장면의 원화.

메이플스토리 ‘집게손가락’ 의혹을 제기하는 남초 커뮤니티 유저들의 주장은 간단했다. 페미니즘 사상을 지지하는 여성 애니메이터가 엔젤릭버스터(엔버) MV에 ‘남성혐오’ 표현인 집게손가락을 몰래 집어넣었다는 것이었다. 커뮤니티 유저들은 뿌리의 다른 작업물을 0.1초 프레임 단위로 분석하며 “집게손가락이 한두 개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튜디오 뿌리가 만든 모든 작업물을 남성이 연출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음모론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깨졌다. 그림을 그린 이는 ‘페미니즘이 뭔지도 모른다’고 한, 에미상을 수상한 베테랑 김상진 감독이었다. 수십명이 함께 작업하고 넥슨도 수시로 검수해 애니메이터가 몰래 집게손가락을 넣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니란 사실도 드러났다.

‘페미니즘에 경도된 여성 직원의 트롤링(관심끌기)’이라는 프레임이 깨지자 ‘그래도 남혐’이라는 주장은 복잡해졌다. 원청 의사와 무관하게 결함이 섞인 상품을 납품한 것이 사안의 본질이라는 주장, 제작자의 성별과 관계없이 페미니즘 자체가 문제라는 주장이 이어졌다. 언론의 보도가 커뮤니티발 조작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이들의 주장들을 하나하나 짚었다.

뿌리가 가해자, 넥슨이 피해자다?

일부 커뮤니티 이용자들은 보도 이후 ‘페미니즘이 본질이 아니다’라고 태도를 바꿨다. 대신 홍보영상 제작을 받은 하청사가 원청의 발주 내용과 다른 ‘불량품’을 납품한 것이 문제라고 주장했다. 하청사 잘못으로 원청사 넥슨은 큰 피해를 입었고, 하청사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응당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5일 경향신문 취재 결과 넥슨은 발주 단계서부터 ‘집게손가락’ 모양이 담긴 일러스트를 첨부해 뿌리에게 영상화를 부탁했다. 넥슨은 지난 9월 뿌리에 프로젝트를 의뢰하면서 장면마다 참고해야 할 일러스트와 영상을 뿌리에 전달했다. 이 참고자료에는 엔버가 ‘집게손가락’ 모양을 한 일러스트도 있었다. 김 감독과 40대 남성인 외주 애니메이터는 이 자료를 참고해 넥슨의 의도대로 엔버의 몸짓과 움직임을 그렸다.

김상진 감독과 외주 애니메이터가 만든 엔젤릭버스터 MV 콘티.

넥슨은 작업 완료한 콘티를 지난 10월25일과 27일 두 차례 뿌리로부터 전달받았다. 넥슨은 “문제없다”고 회신했다. 이후 넥슨은 11월8일, 10일, 16일, 20일, 21일, 22일 23일, 29일에 거쳐 뿌리가 작업한 티져·시사 영상·최종본을 확인했다. 뿌리 측은 “세세한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그림을 고치기 때문에 원청사 의도에 반하는 장면을 넣을 수 없는 구조”라고 했다.

26일 외주업체에 강경 대응을 예고하는 김창섭 넥슨 메이플스토리 총괄 디렉터. 유튜브 갈무리

넥슨의 요청, 확인을 거쳤음에도 논란이 터지자 넥슨은 하청사에 책임을 전가했다. 지난달 26일 김창섭 넥슨 메이플스토리 총괄 디렉터는 유튜브 방송으로 “뿌리와 관련된 조사 결과에 따라 메이플뿐만 아니라 회사 차원에서도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했다. 이후 넥슨은 사과문 작성을 종용하고 법무팀을 보내겠다고 말했다.

넥슨의 압박은 하청사 뿌리의 막심한 피해로 이어졌다. 장선영 뿌리 대표는 “2024년 상반기 진행하기로 했던 프로젝트가 모두 무산된 상태”라며 “막상 넥슨은 아무런 연락을 주고 있지 않다”고 했다.

남자든 여자든 페미라 문제다?

남초 커뮤니티의 두 번째 주장은 집게손가락을 그린 이의 성별이나 의도와 무관하게, 페미니즘의 상징이 담긴 것 자체가 문제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그림을 그린 외주 애니메이터와 김 감독은 ‘남페미’이며, 의도적으로 몰래 집게손가락을 넣은 주범이다.

그러나 김 감독은 지난 3일 “집게손가락은 작화 과정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그는 “손을 쥐었다 펼 때 각 손가락이 펴지는 속도와 모양이 다른데, 마치 가위바위보 하듯 한 번에 펴지는 것처럼 그리는 게 더 부자연스럽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엄지와 검지가 다른 손가락보다 더 굽혀져 있는 모양은 캐릭터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에서 나오는 것인데, 이를 프레임 단위로 잘라 ‘집게손가락’이라고 보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김상진 감독이 3일 서울 구로구 스튜디오에서 애니메이션 작업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홍근 기자

김 감독은 “19살 때부터 30년간 애니메이션을 그렸는데, 수십년 전 그린 그림도 프레임별로 나눠보면 집게손가락과 비슷한 모양이 나온다”면서 “그땐 페미니즘, 메갈리아 이런 단어도 없지 않았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트위터도 없고 페미니즘이 뭔지도 모르는 내가 ‘남성혐오’를 했다는 것도 억울하고, 내가 가르친 대로 그린 애니메이터들을 범죄자로 몰아가는 것도 답답하다”고 했다.

A씨가 개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글을 올렸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는 것은 더 큰 문제다. 개인 공간에 밝힌 정치적 견해를 공격하는 ‘사상검증’이기 때문이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권리와 책임을 구현해 가려고 하는 민주주의 운동인데, 이를 반대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반대”라면서 “페미니즘 자체를 표적 삼고 공격하는 것은 일종의 테러이자 반지성주의”라고 말했다.

언론 보도가 가짜뉴스다?

일각에서는 콘티를 그린 이가 남성이라는 보도 자체가 인터넷 커뮤니티 ‘루리웹’에서 시작됐으며, 증거자료가 조작됐다는 주장도 제기한다. 지난 28일 해당 커뮤니티에 콘티 일부와 함께 올라온 “콘티 그린 사람이 50대 아저씨래”라는 글이 보도의 출처라는 주장이다.

가짜뉴스의 증거라고 제시된 ‘루리웹’ 게시물. 커뮤니티 갈무리

그러나 커뮤니티 게시물과 달리 콘티를 그린 이는 50대가 아닌 40대 외주 애니메이터 B씨로 드러났다. 경향신문이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뿌리는 B씨와 외주 계약을 맺고 9월19일, 21일, 25일, 26일, 27일 콘티와 관련한 자료를 주고받았다. 뿌리는 당시 넥슨 측이 제시한 마감기한이 촉박해 B씨에게 손을 빌린 것으로 파악됐다.

일부 커뮤니티 유저는 A씨가 논란이 된 ‘반쪽짜리 하트’ 장면을 작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A씨가 참여한 다른 장면에 집게손가락이 그려졌다’ ‘언론이 여론을 호도한다’는 주장을 폈다. A씨는 엔버의 변신 작업에 참여했다면서 작업분 일부를 SNS에 올렸는데, 이 그림에서 엔버의 왼손이 집게손가락 모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해당 장면의 원화를 보면 엔버는 집게손가락 모양을 한 것이 아니라 손을 펼치고 있다. 뿌리 측은 “이 장면을 집게손가락이라 하는 건 누가 봐도 억지 주장”이라고 했다.

A씨가 SNS에 올린 영상. 커뮤니티 갈무리

전문가들은 남초 커뮤니티가 음모론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것이 공론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진단했다. 심석태 세명대 저널리즘 대학원 교수는 “사람들이 사실을 가지고 다투는 게 아니라, 자기 확신이나 신념과 배치되는 사실은 아예 관심을 기울이려 하지 않아 논의 자체가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과거 지구평면설을 믿는 사람들은 매우 특이하고 소수이며,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안 준다면 현재는 (남초 커뮤니티 유저들은) 시끄럽게 공론화시키려 시도하면서도 사실관계에는 관심 없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김수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현재 반페미니즘 주장은 ‘내가 가진 것을 빼앗겼다’는 서사에 기반을 두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면서 “일부 정치인이 이 서사를 적극적으로 청년 동원에 사용하면서 생긴 해로운 문제”라고 했다.

넥슨 측은 이날 “내부에서 논란이 제기된 여러가지 사안에 대해 팩트 여부를 확인하고 있는 단계”라고 밝혔다.

이홍근 기자 redroot@kyunghyang.com, 정효진 기자 hoho@kyunghyang.com, 김은성 기자 k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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