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예술 발원지' 학전 폐관에 예술인들이 한 말
33년 만에 폐관 앞두고 프로젝트 공연
학전 거친 배우·가수 등 마음 모아 준비
"폐관도 학전답게…정신은 없어지지 않아"
[서울=뉴시스]추승현 기자 = 한국 공연문화의 발원지인 극단 '학전'이 내년 봄 폐관을 앞뒀다. 후배들은 학전을 만들고 그 안에서 문화예술인으로 성장할 수 있게 만들어 '포크계 대부' 김민기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전하기 위해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한국 공연문화의 뿌리가 '학전 어게인(AGAIN)'으로 되새겨진다.
5일 서울 강서구 한국음악저작권협회 KOMCA홀에서 '학전 어게인' 프로젝트 기자회견이 열렸다. 작사가 김이나가 진행을 맡고, 가수 겸 저작권협회 부회장 박학기, 작곡가 김형석, 듀오 유리상자 박승화, 밴드 여행스케치 루카, 밴드 크라잉넛 한경록과 배우 설경구, 방은진, 배해선이 참석했다.
학전은 1991년 3월 대학로 소극장에서 개관했다. 이곳은 다양한 예술 장르의 교류와 새로운 문화창조 공간으로서 역할을 해왔다. 소극장 뮤지컬 최초로 라이브 밴드를 도입하고, '지하철 1호선' '모스키토' 등 한국 창작 뮤지컬 성장에 몫을 했다. '고추장 떡볶이' '슈퍼맨처럼~!' 같은 어린이극도 이곳에서 탄생했다. 밴드 자전거 탄 풍경, 시인과 촌장, 가수 강산에, 윤도현 등과 배우 황정민, 김윤석, 이정은 등 대한민국 문화를 책임지고 있는 수많은 예술인들이 학전 무대를 거쳤다.
학전을 만든 김민기 대표는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1971)을 작사·작곡한 인물이다. 이 노래가 1975년 유신 정부의 긴급 조치 9호에 의해 금지곡으로 선정되고, 1987년 민주화운동 상징곡이 된 역사가 있다. 박학기는 "연세대 앞에서 큰 데모가 있었는데 저도 지적 허영심에 껴서 소리를 지르면서 전경들과 대치하는 상황이었다"며 "큰 충돌이 일어날 것 같은 걸 모두가 감지했는데 누군가 한 명이 아침이슬을 부르고 모두가 따라 했다. 3만 명 모두가 부르면서 차분해지는 그 일은 제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기억"이라고 회상했다.
김 대표는 이후 학전을 통해 가수이자 뮤지컬 연출가로 우리나라 예술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아울러 후배들에게 길을 터준 아버지 같은 사람이다. 설경구는 학전에서 포스터를 붙이다가 김 대표의 제안으로 연기를 시작하게 됐고, 장현성·배해선은 학전 오디션을 보고 배우 생활의 첫 발을 내디뎠다. 박승화는 김민기의 노래로 가수의 꿈을 꾸기 시작했고 유리상자의 첫 공연을 학전에서 했다. 김 대표는 후배들이 훌륭한 예술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장소를 마련해주고 월급을 챙겨주며 도움닫기를 할 수 있게 했다. 그런 학전이 코로나를 겪으며 힘들어졌다. 김 대표의 몸에 이상이 생기면서 그가 이곳을 유지하기도 어려워졌다.
"학전은 꿈의 장소였어요. 이곳에서 음악을 시작했고 많은 연극인들이 나왔어요. 나름대로 뿌리를 내리고 나무로 성장했죠. 어느 날 돌아보면 그 자리에 있는 바위처럼 김민기 선배님이 항상 계셨어요. 부모님들이 그렇듯이 저 모습으로 영원하리라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나이도 많이 드시고 혼자 힘든 걸 감내하고 계셨더라고요. 학전이라는 극전이 원형으로 유지될 수 있는 게 말이 안 된 거였습니다."(박학기)
학전은 내년 창립 33주년을 맞이하며 역사 속으로 간다. 이에 앞서 학전의 추억을 갖고 있는 예술인들은 '한국 공연문화의 뿌리는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또 다른 싹을 틔우며 지속되리라'는 소망을 담아 프로젝트 공연을 진행한다. 가수 2명과 배우 1명이 함께하는 공연과 '김광석 다시 부르기' 공연, '김민기 트리뷰트' 공연 총 3가지로 구성됐다. 서울 종로구 학전블루에서 내년 2월28일부터 3월14일까지 릴레이로 진행된다. 라인업은 추후 공개된다.
프로젝트는 학전에서 김 대표와 함께 김광석 콘서트를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박학기가 선봉장에 나섰다. 박학기는 "3가지 구성이라고 했지만 플러스알파가 있다. 다 계획해놓고 시작하자고 하면 시작이 안 될 것 같아 일단 했다"고 밝혔다. "배우들이 나름대로 어떤 콘텐츠를 할 수 있어서 회의를 하고 있다. 유재하도 김민기 선배님과 떼려야 뗄 수 없어서, 유재하 가요제 출신 뮤지션들이 모여서 하루 무대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설경구는 "저를 끌고 가준 공간"이라며 "공연한다고 하는데 배우들이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학기 형이 무대 위에 올라오라고 해서 간다"고 무조건적인 참여를 강조했다.
학전의 명맥이 이어지는 것을 원하지만 실질적으로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소극장이 유지되는 것도 좋지만, 학전의 정신을 보존하고 싶은 것이다. 방은진은 "기업의 후원이라든지 정부주무부처 등에서 보전 유지를 바라고 유형의 공간을 산다고 해서 극장이라는 곳이 돌아가지 않는다"며 "어린아이처럼 꿈꾸고 있지 않다. 폐관도 학전답게 하는 것에 뜻을 모았다"고 했다. 이어 "소극장을 꾸준히 운영한다는 게 개인이 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3주년을 계기로 해서 닫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많이 안타깝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했다"며 "김민기가 존재하지 않는 학전이 어떻게 흘러갈지, 어떻게 영예롭게 후대에도 어떤 영향을 끼칠지 생각하신 것 같다. 함께해 주는 동료가 있다는 걸 느끼셨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다.
"'아듀 학전', '학전 라스트 콘서트' 등 이름을 고민했는데 강산에 씨가 저에게 의견을 제시했어요. 학전이 문을 닫든 하드웨어가 없어져도 출발한 정신이 없어질 수 없으니까요. 다른 형태로 다시 탄생할 수도 있으니 '학전 어게인’에 모두 공감했어요."(박학기)
김 대표는 소극장이 이관한다고 해서 폐관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박학기는 "김민기 선배님은 '본인의 힘으로 어려움을 막아내면서 살아가셨는데 내가 없이 그 짐을 누구한테 짓게 하냐. 끝나면 조용하게 끝나는 거지’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관 제안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는 건 선배님 뜻과 다르다"고 했다. 방은진은 "학전블루에 있는 김광석 선배님의 노래비, 벽채 하나만 건물주가 바뀌든 뭐든 남겨줬으면 좋겠다는 요청이 있다. 마로니에의 산실이라고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진 마당에 그것 하나 지키고 싶다"고 했다.
박학기는 한국 문화예술의 시작에 학전이 있었다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어제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이 있고 씨앗이 나무가 된다. 오늘날 방탄소년단(BTS), 블랙핑크가 있었던 건 어려운 상황에 출발한 누군가가 있어서일 것"이라고 했다. 김형석 또한 "K팝이 글로벌하게 잘 되고 있는데 근간에는 우리의 디엔에이(DNA)가 형의 음악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의미 있는 음악과 공연이 펼쳐졌던 학전이라는 공간이 새로운 꿈나무들에게 기회가 마련되는 곳으로 유지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왔다"고 했다.
수익금과 후원은 학전의 다음을 위해 쓰일 예정이다. 어떤 형태로 다시 시작될지 구체화되지 않았지만 차근차근 만들어 갈 생각이다. 박학기는 "학전은 재정 상태가 엉망"이라며 "코로나를 겪으면서 어린이극이고 뭐고 다 안 했다. 김민기 선배님은 저작권이 나오는 것도 모두 그곳에 쓰고, 여러 부채를 선배님이 안을 생각을 해서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이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새로운 출발을 위해 쓰일 것이니 혹시라도 그런 생각이 있으면 기부하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학전을 찾는 팬들을 위한 굿즈 제작 등을 고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공감언론 뉴시스 chuchu@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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