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만 가는 거 아냐?" 심박수 챌린지→실존 인물 관심까지, '서울의 봄' 흥행 이유는[TEN초점]

이하늘 2023. 12. 5.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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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12 군사반란 다룬 '서울의 봄'
심박수 챌린지부터 실존 인물에 대한 관심
'서울의 봄' 흥행 이유는 무엇?

[텐아시아=이하늘 기자]

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사진제공=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한국 영화에도 봄이 오려는 징조일까. 유독 시리고 춥던 겨울만이 반복되던 한국 영화계에 '서울의 봄'이라는 하나의 씨앗이 꿈틀거리면서 새싹을 피우려는 듯하다. 매서운 추위를 이겨내고 꽃피운 희망은 유독 반짝거리며 아름답다.

'서울의 봄'(감독 김성수)이라는 새싹은 관객들의 끊이지 않은 발걸음으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 지난 11월 22일 개봉한 '서울의 봄'은 지금 흥행 러쉬 중이다. 12월 5일 기준, 개봉 2주 만에 누적 관객 수 500만 334명을 기록했다.

2023년 한 해 손익분기점(BEP)을 넘은 한국 영화가 5편('서울의 봄' 포함/손익분기점 460만명)이라는 수치를 되돌아본다면, '서울의 봄'의 고공행진하는 관객 수는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범죄도시3'(누적 1,068만명/손익 180만명), '밀수'(누적 514만명/손익 400만명), '잠'(누적 147만명/손익 80만명), '30일'(누적 200만명/손익 160만명)이었기 때문이다. 침체된 한국 영화의 상황 속에서 '서울의 봄'의 흥행은 반가울 따름이다.

하물며 '서울의 봄'과 관련한 신기한 현상도 포착되고 있다. 1979년 12.12 군사 반란의 씁쓸한 역사를 다루는 '서울의 봄'을 관람하는 관객들은 일명 심박수 챌린지(심박수를 잴 수 있는 스마트워치로 영화 전후의 심박수를 체크해보는 챌린지)를 하기도 한다고. 극장을 들어가기 이전과 이후의 심박수 변화를 측정하며, 141분가량의 러닝타임 동안 얼마나 분노를 유발했는지를 체크하는 포인트라고 하니 '서울의 봄'이 얼마나 입소문이 났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간 한국 영화 위기론으로 덜컹거렸던 영화계에서 피어난 '서울의 봄'의 무엇이 흥행으로 이끌었던 것일까.

POINT 1. 현대사를 바꾼 '1979년 12·12 군사 반란'이란 씁쓸한 역사

사진='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 캡처본.



1979년 12·12 군사 반란을 요약하면, 대한민국 육군 내 비밀 사조직인 하나회(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 및 선후배들로 된 구성원)의 전두환과 노태우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군사 쿠데타다. 빛바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다시금 넘겨봐야 하는 까닭은 12.12 군사 반란으로 인해, 1961년 5·16쿠데타로 시작됐던 박정희 군사정권에 이어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까지 약 31년간 동안 암흑의 시절을 맞았기 때문이다.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소리소문없이 벌어진(당시, 시민들은 다음날 거리에 나와 있던 탱크들을 보고 영문을 모르기도 했다고) 12·12 군사 반란으로 인한 결과는 이러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구성된 신군부가 국군을 장악했고, 국민들의 민주화를 향한 요구는 거세졌다. 이에 반란군들은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으며 이는 대규모 집회로 번져 1980년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는 계기를 마련했다.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계엄군들은 시민들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했다. 

사진='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 캡처본.



1987년 6월 민주항쟁 역시 12.12 군사 반란의 여파다. 1987년 4월, 전두환은 대통령 간접 선거 조항을 사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국민들의 반발이 거세졌다. 대통령 직선제를 간절히 바라던 국민들은 시위를 계속했으며, 그 과정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분노는 들끓었다.

또한, 6월 9일 연세대학교의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고 피를 흘리던 사진을 로이터 통신 사진기자인 정태원 기자가 담아내고 기사로 보도되면서, 6월 10일 본격적인 항쟁이 시작됐다. 당시, 정권은 시국을 수습하기 위해 6.29 선언이 발표했고 대한민국은 지금의 직선제로 정착하게 되었다. 12.12 군사 반란이 가져온 파장을 모두 나열할 수는 없지만, 굵직굵직한 사건들 속에서 우리는 12월의 그날이 무엇을 변화시켰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POINT 2. 전 연령층의 고른 예매율과 유독 눈에 띄는 20·30세대의 관람

사진=CGV 관람 연령층 챕처본(12월 5일 기준)
사진=JTBC 뉴스 영상 캡처본.



'서울의 봄' 흥행과 관련한 신기한 지점은 관람 연령층이다. CGV 관객 분석(12월 5일 기준)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우선 여성과 남성의 비율은 51%와 49%로 비슷하며, 연령층별 분석으로는 10대(4%), 20대(26%), 30대(30%), 40대(23%), 50대(17%)를 기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80년대생~2000년대 초반생들까지(만 나이 도입으로 이렇게 표기하겠다)가 주요 관객층이라는 것이다. 물론 전 연령층이 고르게 예매하기도 했으나, 해당 시기를 겪지 못했던 2030의 예매율이 높은 것은 놀라운 수치라는 전문가들의 지적도 잇따랐다.

윤성은 영화 평론가는 '서울의 봄'의 흥행에 관련해 "코로나19 여파가 어느 정도 있었던 '남산의 부장들'(2020)이 흥행한 사례를 보면, 한국 현대사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은 꾸준했다. 12·12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교과서에서 자세히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에 상업 영화에서 좋은 소재다. 그렇다고 해도 영화가 재미없으면 20·30대들은 보지 않을 텐데 '서울의 봄'은 신군부를 막을 수 있을 듯 없을 듯 심장을 쫄깃하게 하는 재미가 있다. 기성세대는 직접 그 시대를 겪었기에 익숙하지만, 그 시대를 겪지 못한 젊은 관객들은 가까운 과거임에도 잘 알지 못하는 현대사의 이야기라 더 분노하게 되는 것 같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심박수 챌린지, 각종 밈을 생산해내는 20·30세대가 '서울의 봄' 흥행 및 입소문의 주요한 요인이 된 까닭은 그간 정확하게 알지 못했던 역사를 스크린을 통해 만나면서 같이 '분노'하고 아파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POINT 3. 잿빛으로 물든 새벽, 숨 막히는 긴박감을 재현한 김성수 감독의 연출력

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사진제공=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단순히 12.12 군사 반란을 처음으로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이라는 것이 '서울의 봄' 흥행의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다. (MBC 드라마 '제5공화국'(2005)는 1979년 10.26 사건부터 1987년 6.29 선언까지 다뤘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연출을 맡은 김성수 감독의 탁월한 감각 때문일 것이다.

평균적으로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영화가 관객들의 관심을 받아온 것은 사실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다룬 영화 '1987'이 누적 관객 수 723만명을,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 '택시운전사'가 누적 관객 수 1,218만명을, 1979년 10.26 사건을 일으킨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를 다룬 영화 '남산의 부장들'이 누적 관객 수 475만명을 모은 것만 봐도 관객들이 한국의 현대사에 가지고 있는 관심이 얼마나 높은지를 알 수 있느냐를 알 수 있지만, '서울의 봄'의 흥행을 단순히 역사물을 다룬다는 것으로만 요약하기엔 무리가 있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 '택시운전사', '1987'스틸컷. /사진제공=㈜쇼박스, CJ ENM



영화 '서울의 봄' 오프닝을 보자. '서울의 봄'은 육군본부 출입 금지 지역으로 들어간 군인들이 우왕좌왕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이태신(장태완 모티브 인물/정우성) 역시 "무슨 상황이냐"라고 물으며 당혹스러워한다. 10.26 사건으로 인해 대통령이 사망한 순간부터 '서울의 봄'은 시작된다. 이후, 육군참모총장 정상호(정승화 모티브 인물/이성민)은 육군 내 비밀 사조직 하나회의 수장이자 보안사령관 전두광(전두환 모티브 인물/황정민)이 권력을 잡고 좌지우지하는 것이 못마땅해 그를 멀리 보직 이동을 시키려고 하지만 전두광은 그 소식을 듣고는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한다.

김성수 감독은 12.12 군사 반란이 일어나며 종결되기까지의 9시간가량의 시간을 141분의 러닝타임 안에 밀도 있게 압축해낸다. 절묘한 교차 편집은 '서울의 봄'의 긴장감을 한층 높이는 방아쇠가 되고, 어둠이 내려앉은 새벽의 차가운 공기 질감을 담아낸 카메라는 피부를 느낄 정도의 생생함을 높이며, 사건이 변화됨에 따라 시시각각 태세를 전환하는 전두광을 따르는 주동자들의 현실적인 연기 앙상블은 역사라는 정해진 기록에 '이랬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피어오르게 만든다.

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사진제공=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이러한 합은 '서울의 봄'이라는 엔진이 멈추지 않고 달려 나가는 추동력을 만들어냈다.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역의 배우 정우성과 상황을 장악하기 위해서 갖은 수를 쓰는 보안사령관 전두광 역의 배우 황정민의 모습은 힘의 균형감을 팽팽하게 하기도 한다. 

어쩌면 영화 '비트'(1997), '태양은 없다'(1999), '무사'(2001)', '감기'(2013), '아수라'(2016)으로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김성수 감독의 노하우가 '서울의 봄' 안에 가득 담겨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열아홉 살에 집이 한남동이어서 육군참모총장이 납치될 때의 총소리를 들었다. 그 일이 무슨 일인지 몰랐고 나중에 30대 중반이 되어서 알게 됐다. 당혹스럽고 놀라웠다. '이렇게 쉽게 우리나라 군부가 불과 하룻밤 사이에 무너져내렸다니'라는 생각이었다. 총소리를 듣고 44년이 지났는데, 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길래 한국 현대사의 운명적인 전환점이 되어있는지를 다루는 것이 화두였다"라고 밝힌 김성수 감독의 말처럼 '서울의 봄'은 무엇이 현대사를 이렇게 바꾸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에 더욱 흥행에 가속도가 붙는 것이 아닐까 싶다.

POINT 4. '서울의 봄' 이후, 실제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는 상황

사진=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 캡처본.



역사 영화가 힘을 갖는 것은, 해당 사건들을 잊지 말고 기억하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어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울의 봄' 역시, 실제 역사 속에 기록된 인물들을 찾아보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故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행적을 비롯한 '서울의 봄'에 나온 실존 인물들과 영화 속에서 표현된 방식과 비교해보는 것이다.

일례로 배우 정우성이 연기한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의 모티브가 된 장태완 사령관과 배우 정해인이 연기한 오진호 소령의 모티브가 된 김오랑 소령이 그러하다. 실제로 장태완 사령관은 12.12 군사 반란 이후, 반란군들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서빙고에서 45일간 조사를 받은후 수도경비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오진호 소령의 경우, 자신의 사령관(정병주)을 지키다가 교전 중에 사망했다. 사망 당시 계급은 소령이었으나 1990년대에 이르러 중령으로 추서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많은 실존 인물들을 찾아보는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의 봄'의 흥행은 단순히 기록이나 수치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다양한 변화라는 것이 더 중요한 듯하다. '서울의 봄'이라는 하나의 씨앗은 가슴 시린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기억하고 새겨야만 하는 새로운 꽃을 피우게 되지 않을까. 그게 어떤 형태든 말이다.

이하늘 텐아시아 기자 greenworld@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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