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쓰기 40년, 난 아직도 예술을 시험중"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3. 12. 5.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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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작가 찬쉐 단독 인터뷰
재봉틀서 토막글 쓰던 작가
전세계 '노벨상 1순위' 꼽혀
'신세기 사랑 이야기' 한국 출간
성매매업소 '온천여관' 중심으로
전통에 반하는 인물들 이야기
망령과 헛것 등장한 초현실기법
중국 산업화 시대 그늘도 다뤄
노벨문학상 1순위 후보로 꼽히는 중국 소설가 찬쉐가 벤치에 앉아 있다. 사진은 올해 11월 촬영됐으며, 찬쉐가 직접 이메일을 통해 매일경제신문에 보내왔다.

중국은 노벨상에 부정적이다. 노벨상이 인류적 가치가 아닌 서구적 가치를 강화한다고 보기 때문인데, 2010년 반체제 인권운동가 류샤오보의 노벨평화상 수상 이후 편견은 굳어졌다.

그래서인지 올해 10월 중국의 한 여성 소설가가 1순위 노벨상 후보로 외신에 오르내리자 중국판 트위터 웨이보는 그의 이름 해시태그(#)를 금지어로 지정하고 글을 몽땅 삭제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수상을 바라는 독자와 문학가의 열망은 더 커졌다. 노벨문학상이 유럽 남성 작가들의 잔치란 비판 때문이었다. 노벨문학상 122년 역사에 '아시아 여성'은 단 한 명도 없다. 스웨덴 한림원의 저 고루한 선정 공식을 역류시키려면 수년 내 아시아, 그것도 동아시아 여성이 호명돼야 한다.

현존 아시아 여성 작가 가운데, 가장 뜨거운 이름. 모든 외신이 '노벨상 후보'로 꼽는 1인자 찬쉐(殘雪·70)의 신작 소설 '신세기 사랑 이야기'가 한국에 번역 출간됐다.

미리 준비한 11개의 질문을 찬쉐에게 이메일로 보내자 중국 윈난성 소수민족 타이족(族) 자치구 시솽반나(西雙版納)의 산밑 초겨울 따뜻한 방에서 책을 읽던 찬쉐가 A4용지 6장짜리 긴 답장을 사흘 만에 보내왔다. 원고지 40매짜리 인터뷰 전문은 온라인에 싣는다.

"소설쓰기 40년, 하지만 전 지금도 예술을 실험 중이에요. 문득 뇌리를 스치는 기발한 생각의 재현, 그게 바로 저 찬쉐의 글쓰기입니다."

소설 '신세기 사랑 이야기'는 기이한 이야기다. 중국 산업화 과정 속 성(性)산업, 여성 매춘부, 수감과 고초, 불륜과 외도가 복잡한 함수처럼 얽힌 이야기다.

중심 무대는 성매매 업소 '온천여관'이다. '잠자리 테크닉'을 익힌 접대부 뉴추이란은 남성 웨이보의 애인이다. 웨이보는 방직공장 아가씨 룽쓰샹에게 집을 사주고, 미스 쓰에게도 한눈을 판다. 폐에 솜부스러기가 들어가 엉겨붙은 방직공장 직원은 중국 산업화 여공을, 화류계를 택한 여성은 자본의 그늘에 숨어든 여성을 이야기한다.

"'신세기 사랑 이야기' 속 인물은 모두 전통에 반하는 성향이 있어요. 환경이 가하는 압박에 굴복하지 않고 시대에 맞지 않는 규정에 도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그런 비전통적 방식으로 인물들이 사랑을 극치(極致)까지 도달하게 했습니다. 자기 방식으로 사랑을 만들어내죠. 그래서 제목이 '신세기 사랑 이야기(Love in the New Millennium)입니다. 감정적 충동을 따르지 않는 직관, 그게 제 방식이에요."

찬쉐의 글쓰기가 노벨상 수상까지 언급되는 건, 글에 내재된 초현실적 문학기법 때문이다.

그는 현실주의 문학과 거리가 멀다. 우리가 존재를 인식하지만 말을 걸 수 없던 존재들이 출몰하고, 밤귀신과 헛것이 말을 걸어온다. 낯선 것과의 대화, 그것은 자연스럽다. 다음 장의 전개를 알 수 없는 치열한 날것의 문장들까지 겹친다. 어려운 문장은 없다. 다만 이야기에 포박돼 옴짝달싹 못하는 독자가 있을 뿐이다. 이야기의 힘으로 '신세기 사랑 이야기'는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후보작에도 올랐다.

"소설 세계는 유토피아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작은 왕국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일부는 꽤나 처참한 극악의 상황이기도 하죠. 틀에 박힌 환경 속에 드러나는 전형적인 성격을 묘사하지도 않음으로써, 자유로운 경계를 체험하도록 합니다."

'신세기 사랑 이야기'는 찬쉐가 온몸으로 체험한 중국사를 연상시킨다. 찬쉐 집안은 명망 있는 철학자 집안으로, 아버지 덩쥔훙(鄧鈞洪)은 중국철학사의 거두다. 문화대혁명 당시 박해를 받아 교도소에 수감됐다.

소설 속 남성 웨이보가 갇힌 감옥도 부친의 수감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방직공장의 역사를 쓰는 수위 홍씨 아저씨는 역사가로도 이해된다. 초현실과 현실이 조응하는 한편의 방대한 오페라 같은 책이다.

"홍씨 아저씨가 기록한 건 여공들의 '사랑의 역사'예요. 세속적 삶의 재료에서 영감을 받아 소설 속 세계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험적 소설을 쓰는 소설가는 그런 직접적 연관성은 배제합니다. 등장인물이나 줄거리, 배경 모두가 실험적으로 '자아'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일률적으로 기능하는 것이니까요."

올해 나이 일흔. 약 4~5년 전부터 모옌(2012년 수상)에 이어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될 만큰 유명해졌지만, 찬쉐는 사실 서른 살이 넘어서야 글쓰기를 시작했다. 가난 때문이었다.

찬쉐는 재봉틀 앞에 앉아 옷가지를 수선해주는 재단사로 20대에 돈을 벌어야 했다. 하지만 일감이 들어오기 전 10분, 15분씩 썼던 '토막글'이 삶을 지탱했고, 그렇게 쓰다 현재에 이르렀다. 이번 소설에 나오는 방직공장 여공도 재봉틀에 능했던 작가 찬쉐의 과거사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서른이 되기 전 몇 년 동안은 생계를 위해 고군분투했어요. 돈이 생기면 시간이 생길 테니 돈도 많이 벌고 싶었죠. 마침 제가 글을 쓰려고 할 때 중국 정세가 바뀌었고 젊었던 저는 어려움 없이 글쓰는 직업을 택할 수 있었습니다. 1980년대에 저는 젊은 나무였고 이제 늙은 나무가 됐습니다. 하지만 두 상황 다 각각의 멋이 있는 거겠지요?"

찬쉐의 소설은 '글로 쓰는 행위예술'이란 은유가 적당하다.

행위예술은 모든 사람에게 다르게 해석되고, 일부에겐 난해하게 해석될 가능성도 있다. 난해하다는 건 누군가의 몰이해로 이어진다. 그러나 찬쉐의 글을 이해하려면 강의 물색이 아니라 수면 아래를 더듬을 수 있어야 한다.

"행위예술이면서, 행위예술에 비해 이성적 제어를 더 많이 가한 형태일 겁니다. 이때 '이성'이란 것은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사변적 이성, 즉 이론적 인식에만 관계하는 순수이성이 아니고 소설쓰기로써 구현되는 실천이성입니다. 서양 문화는 사유에 능하고, 중국 문화는 실천에 뛰어나잖아요. 제 소설은 중국과 서양이라는 두 문화가 결합된 집합체이며, 저는 저만의 '실천 철학'을 구축하려 노력해 왔습니다."

찬쉐는 '신세기 사랑 이야기'를 두고 한국 독자들에게 말했다.

"새로운 시대의 사랑이라는 풍경이 한국 독자들 마음속의 열정과 상상력, 반성과 창의적 용기를 불러일으켜 독자 자신만의 풍경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흐뭇할 겁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이것이 우리가 속해 있는 우주의 풍경임을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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