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1저자다] ⑦"30대는 불안·초조하다…연구성과엔 시간 더 줬으면"
서울 홍릉 소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한국을 대표하는 과학기술 연구의 산실이다. 이곳에서 젊은 연구원으로 선발돼 일한다는 건 그만큼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 30대 초중반으로 들어선 젊은 연구자들은 불안감에 하루하루가 초조하다. KIST에서 계속 연구를 이어갈 수 있을까, 지금 연구로 사회에서 자리잡을 수 있을까 등 질문이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KIST에서 만난 장지수 광전소재연구단 박사후연구원, 박창훈 양자정보연구단 박사후연구원, 노기창 인공뇌융합연구단 학생연구원은 얼핏 보면 KIST 연구자라는 남 부러울 것 없어보이는 환경에 처해 있지만 정작 젊은 연구자들의 생각은 다르다고 말했다.
이제 30대 초중반으로 들어선 이들은 아직 사회에서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다는 불안감을 느낀다. 주변을 돌아보면 번듯한 직장을 다니며 '내 집 장만'을 위해 차곡차곡 돈을 모으는 친구, 결혼 준비를 시작한 친구가 점점 많아진다는 부담도 있다.
이들의 우선순위 걱정거리는 '내년엔 과연 내가 이곳에서 연구를 이어갈 수 있을까'다. 1년 단위로 계약을 이어가는 불안한 상황에서 내년도 연구개발(R&D) 예산안 삭감이라는 이슈까지 터졌다. "연구자라는 직업에 대한 점점 확신이 줄어든다"고 토로하는 이들은 정책결정권자가 나서 연구자가 오롯이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Q. 현재 어떤 연구를 하고 있나. 연구 환경을 평가하자면.
장지수 박사후연구원(이하 장)=2차원 물질을 적용해 전자회로에서 가장 작은 단위인 소자를 만드는 연구를 하고 있다. 현재 몸담은 KIST는 한국 과학기술의 수준을 대표하는 기관이다. 맨파워가 높다는 뜻이다. 뛰어난 교수들이 각자의 학교 내에서보다 더 활발하게 교류하고 협력하며 연구를 이끌기 때문에 그 아래에 있는 연구자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준다.
노기창 학생연구원(이하 노)=2차원 물질을 기반으로 인간의 뇌를 모사하는 '인공뇌'를 연구하고 있다. KIST는 훌륭한 연구 인프라를 갖췄다. 연구자에게 있어 인프라가 좋다는 건 실험 장비와 재료가 잘 갖춰졌다는 걸 뜻한다. 실험을 수행하려면 재료 합성부터 소자 제작, 측정까지 많은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이때 필요한 장비가 모여있을수록 좋다.
박태훈 박사후연구원(이하 박)=양자암호를 연구하고 있다. 양자통신에서는 임의의 비밀 키를 생성해 암호를 해독해야 한다. 이때 양자 암호키를 분배하고 관리하는 기술을 개발한다. 내 분야에서도 연구를 할 때 필요한 것들을 쉽게 가져다 쓸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으로 작용한다.
Q. 요즘 연구는 잘 되어가나.
장=하루하루 실험하고 실험 결과를 지켜보며, 매일 성적표를 받는 기분으로 살고 있다. 실험은 실패로 이어지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나는 실험 아이디어가 많다. 좋은 아이디어가 20개 생각나면 모두 실험해보는데, 그중 딱 하나만 성공한다. 그럴 때면 '내가 정말 연구자로서의 자질이 있을까' 의심하게 된다.
노=신소재 연구는 참조할 논문이 많지 않다. 어떤 결과를 얻더라도 이게 맞는 결과인지 판단하기 힘들다. 연구라는 것이 정해진 답이 있는 게 아니지만, 새로운 것을 처음 시도한다는 점에서 막막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아무리 밤을 새서 연구해도 노력 대비 얻는 게 적다.
박=처음 연구를 시작할 땐 누구나 내 연구 분야가 관심을 많이 받고, 관련 일자리도 많이 만들어지길 바란다. 양자암호 기술도 예전보다 관심을 많이 받게 됐지만 아직 너도 나도 쓸만큼 상용화된 기술이 아니어서 기대했던 것만큼 자리가 많이 생기진 않은 것 같다.
Q. 외부에서 볼 때 '연구원'이라고 하면 공부 많이 한 엘리트 특권층이라는 인식도 강한 편이더라. 실제 삶은 어떤가.
장=연구 분야를 떠나 박사후연구원이라는 직위 자체가 박사 졸업 후 학교와 직장 사이에 있는 불안정한 위치다. 실제로도 1년 단위 계약직으로 일한다. R&D 예산삭감 이후로는 박사후연구원들 사이에서 어느 연구실 누가 해고됐다더라는 얘기가 들려오고 있다. 불안한 자리다.
노=불안하다. 한국은 특히 '이 나이 땐 이 정도 해야지'라는 정서가 강하지 않나. 30대 초중반이면 어딘가에서 안정된 자리를 잡고 슬슬 결혼도 준비해야한다는 압박이 있다. 연구자는 생애 주기가 일반적인 루트와는 조금 다르다. 회사에 취직해 잘 살고 있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친구들과 나를 비교하게 되고 더 불안해진다. 나도 빨리 자리잡아서 안정적으로 살아야한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거다.
예컨대 '어느 집 아들이 부모님이랑 여행 다녀왔대'라는 말을 들으면 나도 부모님 여행도 보내드리고 맛있는 것, 좋은 것 사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난 내가 하고싶은 걸 선택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건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기에 R&D예산 삭감 같은 일들이 터지면서 점점 연구원이라는 직업에 대한 불확신과 불안감이 커졌다.
장=(얼마 전에 결혼했는데) 결혼 자체도 어려운 결정일 수 있지만, 결혼 이후로도 난관이 있다. 출산과 육아가 그렇다. 법적으로는 출산·육아 휴가가 보장돼 있지만 실제로는 3개월 안에 모두 복직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기업보다 연구원의 상황이 더 열악하다고 본다. 연구 과제를 맡으면 오랫동안 내 자리를 비워둘 수 없기 때문에 법적 휴직 기간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Q. 이런 불안감을 해소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노=우선 일자리의 불안감을 해소해야한다. 예컨대 박사후연구원을 일정 기간 이상 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해준다거나 하는 식이다. 연구라는 길을 선택할 때 연구자가 불안감을 느끼는 요소가 많이 고려되면 좋겠다.
박사후연구원은 계약직으로 연구를 하다보니 주어진 시간 내에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다음 커리어를 이어가기가 쉽지 않다. 어느 기간만큼은 시간을 줘서 부담감 없이 연구에 몰입할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 물론 단기간 내에 성과를 내는 것도 실력이지만, 모든 연구가 그럴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시간을 좀 더 주고 기다려주면 좋겠다.
박=보통 박사후연구원은 1년 단위로 계약한다. 1년이라는 시간은 새로운 과제에 도전하기에 너무 짧은 시간이다. 특히 양자암호기술 같은 연구 분야에서는 너무 촉박하다. 적응과 실패를 고려했을 때 최소 2~3년은 확실히 보장돼야 연구자가 새 연구를 할만한 용기가 나지 않을까.
Q. 과학기술계의 목소리가 정치권에서 어느 정도 반영된다고 느끼나.
장=추진되는 과학기술 정책을 보면 정말 과학에 대한 애정과 전문지식을 가진 이가 정치권에 있는지 궁금할 때가 많다. 한편으로는 과학계가 정치적인 상황과 맞물려 있으면 정치에 종속된다는 생각도 든다. 정부가 바뀌면 과학기술 정책도 바뀐다. 연구자들은 정권마다 눈치보면서 자신의 입장을 달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혼란스러운 거다.
박=과학기술인이 과학기술 정책을 펴기 위해 반드시 정치인이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정치인이 과학기술에 관심을 갖고 이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직접 조언을 얻는 건 필요하다. 많이 물어보고 경청하면 좋겠다.
노=연구자는 연구를 열심히 하는 게 국가에 이바지하는 길이다. 자기자리에서 연구를 할 때 가장 빛난다. 우리가 우리 자리에서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귀를 기울이고, 과학자에게 실제 상황과 현상을 묻는 자세를 가지면 좋겠다.
Q. 앞으로 누군가의 선례가 될 거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떤 선배 연구자가 되고 싶나.
장=순수한 마음으로 과학자를 꿈꿨고 과학자가 됐다. 그 순수한 마음으로 과학자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격려를 해주고 싶다. 내가 몸담은 연구실의 한 연구위원(PI)이 내 롤모델이다. 학생의 삶에 많은 관심을 갖고 인간적인 대우를 해주는 선배 연구자가 되는 게 꿈이다.
박: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연구에 몰입하는 게 쉽지는 않다. 내가 순수하게 즐기면서 연구를 이어갈 수 있는 성격인지 생각해보는 걸 추천한다. 나를 가르쳤던 지도 교수님은 '과정'을 중시했다. 하나를 시작했으면 중도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해보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내가 누군가의 선배 연구자가 된다면 성과보다 과정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학생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연구자가 되고싶다.
[박건희 기자 wiss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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