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하고 싶다면 오늘 하루를 이렇게

한겨레 2023. 12. 5.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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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이선경의 나를 찾아가는 주역]

픽사베이

뜻밖의 부고로 삶이 무상(無常)할 때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뜻밖의 부고에 마음이 울적하여 산책에 나섰다. 불어오는 바람에 나뒹구는 낙엽이 처연하여, 월명사의 제망매가(祭亡妹歌)를 읊조린다.

삶과 죽음의 길이 여기 있음에 /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이르고 가버렸는가 /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리저리 떨어지는 잎새처럼 /한 가지에 나고도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 아, 아미타불의 세계에서 (그대를) 만날 나는 / 도 닦으며 기다리리다 <삼국유사>

바람에 속절없이 잎새가 떨어지듯, 사람의 목숨도 예측할 수 없이 져버릴 때가 적지 않다. 아니 예측할 수 있었더라도, 떠나고 보내는 애통함이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유교국가의 임금인 세종대왕이 소헌왕후를 잃고, 신하들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불당을 지어 아내의 명복을 빈 것은 그리하지 않고 견딜 수 없는 심정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세종은 유교의 가르침만으로는 그 무너지는 마음을 추스르기에 부족했던 것일까? 그러고 보면 유교에서는 상례(喪禮)를 성대하게 치르고 제사를 정성껏 지낼지언정 내세에 대한 보장도, 윤회(輪廻)라는 다음 생에 대한 기대도 말하지 않는다. <논어>에 “삶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 하였고 또 “사람도 다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라 하였듯이, 공자는 ‘현생’과 ‘사람’에 집중했다. 그러나 죽음이란 사람이 살아가면서 맞닥뜨리는 매우 중요한 삶의 문제다. 사람의 삶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죽음의 문제를 도외시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는 공자가 해설서를 썼다는 <주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낳고 낳는(生生) 것을 역(易)이라 한다.”라고 한 데서 볼 수 있듯 <주역>은 생명을 예찬하는 책으로 알려져 있으며, 실제로 죽음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주역>은 애초에 우환을 대비하고 대처하기 위해 만들어진 책인데, 사람의 삶에서 가장 큰 우환인 ‘죽음’에 대해 적극적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1997년 여의도한강공원에서 펼져진 전통 상례 재현 행사. 이혜정 기자

<주역>이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

사람은 누구나 살기를 바라지 죽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죽음을 이야기할 때 일차적으로 현세적 삶에 대한 애착, 불멸에 대한 집착이 함께 문제가 될 것이다. 종교사상들은 죽음을 극복하는 길에 대해 이러저러한 답을 제시해 왔다. 아예 현세의 삶이 영원히 지속하는 장생불사의 길을 제시하기도 하고, 천국 또는 극락을 말하며, 현생에서의 과보에 따른 윤회를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사후세계의 복락을 기대하는 방식은 죽더라도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저세상으로 이사 가서 행복을 누린다는 설정이고 보면, 그 역시 현세적 삶에 대한 애착이라는 틀을 벗어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그러한 설정이 없이도 언제 떠나든 삶에 대한 집착과 미련이 없이 편안할 수 있다면, 이 역시 죽음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식이지 않을까? 원효스님이 “일체 걸림이 없는 이는 단박에 생사에서 벗어난다”라고 하였듯이 말이다. 이런 생각이 통용될 수 있다면, <주역>은 충분히 어떻게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주역>은 나의 본성과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고 궁극적으로 ‘명(命)’을 깨달아, 순명(順命)하는 삶을 살고자 하기 때문이다. <주역>의 서문에는 이 책이 만들어진 목적이 ‘자신의 본성과 천명을 따라 살면서, 변화의 도를 다하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변화의 한 양상이다

역(易)은 ‘변화’라는 뜻이다. <주역>이 바라보는 우주는 한순간도 멈춤이 없이 영원히 변화의 흐름 속에 있다. 생각해 보자, ‘영원히 변화한다’는 것은 본래 시작이 없으며 끝도 없다는 말이 된다. 다시 말해 종말이 없다. 마치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또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오듯이, 끝났는가 하면 다시 시작하고, 또 끝났는가 하면 다시 시작하는 것이 우주 변화의 영원한 패턴이다. 그래서 <주역>에서는 시종(始終)이라 하지 않고, 종시(終始)라고 한다.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는 죽음도 커다란 변화의 흐름 속에 있는 것이지, 변화를 벗어난 별도의 우주로 진입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이란 변화의 한 마디를 마친 것뿐이어서 소멸이 아니다. <주역>에서는 이에 대해 “정기(精)와 기(氣)가 만물이 되고, 혼(魂)이 떠돌며 변화가 일어난다.”라고 하였다.

이선경 제공

생명은 기(氣)가 뭉쳐서 시작되는 것이고, 죽음은 기가 흩어짐으로써 나타나는 것이라는 이해 방식은 전통적으로 유가와 도가의 공통적 인식이었다.

장자(莊子)의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에 친구 혜시가 문상을 갔더니, 장자는 두 다리를 뻗고 앉아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를 본 혜시가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라 질책하자, 장자는 이렇게 답했더란다. “여보게, 내 아내가 세상을 떠났는데, 나라고 어찌 슬픈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런데 곡을 하다가 가만히 생각하니, 삶이란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었네, 형체도 없던 것이며 기운조차도 없던 것이네. 뭔가 흐리멍덩한 것이 변하여 기운이 되고, 그것이 형체가 됨으로써 삶이 있게 된 것이네. 이제 그가 죽어서 변화한 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변화하는 것과 같은 것일세. 이제 그 사람은 하늘과 땅이라는 거대한 방 속에서 편안히 쉬고 있는데, 내가 엉엉 우는 것은 명(命)에 통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이승의 삶은 거대한 천지 변화의 흐름 속에서 잠시 갖는 ‘일시적 모습[객형客形]’에 불과하다. 동이를 두드리고 노래를 부르며 장례를 치르는 모습은 소멸에 대한 애도가 아니라, ‘인생’이라는 큰 변화의 한 마디를 마치고 천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이를 기리는 일종의 엄숙한 의식(儀式)이자 공연(performance)과 같다.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삶도 죽음도 영원한 변화의 양상에 불과하므로, 어느 한쪽에 집착하여 일희일비할 일이 아니다.

슬픔 속에서도 자신의 생명을 손상하지는 말라

상례와 관련된 직접적 내용으로는 <주역>에 ‘옛적에는 일정한 상기(喪期)가 없었는데, 후세에 성인이 관곽 등의 제도를 정하였다’라는 이야기 정도가 쓰여있다. 구체적인 의례를 위해서는 <예기>라는 문헌을 따로 두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유교는 상례와 제례를 매우 중시한다. 삶과 죽음의 구조를 기(氣)의 뭉침과 흩어짐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장자처럼 그렇게 호방하게 툭 털어버리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천하의 공자도 수제자 안회가 죽었을 때,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라며 절망가운데 통곡을 하지 않았던가?

죽음은 떠나가는 당사자의 문제일 뿐 아니라, 남아서 다시 살아가는 이의 문제이기도 하다. 상기(喪期)를 정하고 상례의 절차들을 마련하는 것은 본래 추모와 치유를 위한 것이겠다. 떠난 이와 보낸 이 사이의 관계의 정립이다. 공자는 ‘상례는 형식이 아름답기보다는 슬퍼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슬픔을 다루는 원칙은 ‘슬퍼하지만 스스로를 상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는다[哀而不傷]’는 것이다. ‘애이불상(哀而不傷)’이라는 행동양식은 서로 반대되는 양극단을 조절하는 역의 철학을 기반으로 한다. 이른바 중용(中庸)이다. 현재 맞닥뜨린 절망적 사태 앞에서,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자기 생명의 건강성을 지키려는 ‘자중자애’의 노력이야말로 <주역>이 가리키는 삶의 방향이다.

이 세상에는 결과적으로 ‘명(命)’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숱한 죽음들이 있다. 누구도 그 이유를 납득이 되도록 해명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죽음들을 대면하는 표준적 지침은 ‘애이불상’이다. 공자는 중도(中道)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 예(禮)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자신을 잘 다스리고 유지하는 것이라 하였다. 슬픔이 부족하다면 상례의 절차들을 잘 지킴으로써 슬픔을 다하도록 하고, 슬픔이 지나치다면 예(禮)를 따름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손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상례가 무너진 시대를 산다. 전통적 상례는 그야말로 유물이 되었고, 각박한 삶의 환경 속에 당일 탈상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현대인이 처한 현실이다. 상례의 실종은 우리가 상실의 아픔 속에서 적절히 슬퍼할 수 있는 형식을 잃어버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마음을 정화하고 치유할 기회가 사라졌음을 뜻한다. 종교와 심리학이 협력하여 현대인을 위한 상례와 제례의 모델을 제안해 봄직하지 않은가?

픽사베이

오늘 하루의 삶에 영원이 담겼다.

<주역>은 분명 생명을 예찬한다. “낳고 낳는 활동이 끊임이 없는 것을 역(易)이라 한다”라 하여, 생생(生生)을 역의 본질이라 하니 말이다. 그런데 이 ‘생생’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은 음과 양의 상호작용이다. 밤이 한 번 지나고 낮이 한 번 지나서 하루가 이루어지며, 더위가 한차례 오고 추위가 한차례 와서 한 해가 이루어진다. 들숨과 날숨, 눈의 깜박임, 밀물과 썰물의 작용 등이 모두 음의 움츠림과 양의 펼침 작용이다. 그러니까 낮, 더위, 들숨, 밀물만 있어서는 안되고 밤, 추위, 날숨, 썰물도 있어야 ‘생생’이 되는 것이다.

‘생생’이란 보다 정확하게는 ‘생사·생사…’의 연속이다. 마치고 시작하기를 반복하면서 순간순간 평형을 찾아가는 무궁한 변화가 생생이다. 쉬운 예로 우리의 생명은 순간순간 세포들의 끊임없는 생멸 작용, 즉 ‘생생’을 통해 유지된다. ‘생생’은 죽음의 상대어로서 ‘생’이 아니라, 순간순간 생과 사를 통과하며 새롭게 정립되는 것이다. 생물학적인 의미에서의 사망만이 죽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작은 단위에서 삶과 죽음의 연속이자 통일이다. “날로 새롭고, 나날이 새로우라”라는 <대학>의 구절은 다시 생각하면 매일매일 작은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자신의 인격을 늘 새롭게 갱신하라는 뜻이 된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계에서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이 순간뿐이다. 그것이 ‘참’이다. 하늘 아래 모든 사물은 끝없는 변화 속에 순간순간 존재한다. 그것은 결코 무상(無常)하기에 허망한 것이 아니라 늘 새롭게 참으로 존재한다. 이 순간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가!

<주역>은 변화를 벗어난 영원불변의 안식을 구하지 않는다. 영원한 세계는 저 건너 피안이 아니라 생생(生生)하는 현장인 여기에 있으며, 여기서 오늘을 살아가는 나 자신에게 있다. 이것이 죽음의 문제에 대한 <주역>의 답이라 생각한다. 천하의 명문(名文)으로 일컬어지는 횡거(橫渠) 장재(張載, 1020~1077)의 「서명(西銘)」 끝자락에는 이와 같은 <주역>의 사생관이 담겨 있다.

부귀함과 윤택함은 나의 삶을 두텁게 하며,

빈천함과 근심 걱정은 너를 옥과 같이 이루리니,

살아서는 나 순종[順事]하고,

돌아갈 때 나 편안하리라

살면서 부귀함을 만나든 빈천함을 만나든 그 명(命)에 따라 순리롭게 살다가 돌아갈 때에도 의심없이 편안한 모습, 그것이 <주역>의 사생관에 따른 삶의 모습이 아닐까.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마음을 다하면 본성을 알게 되고,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알게 된다. 그 마음을 보존하고 그 본성을 기르는 것이 하늘을 섬기는 방법이다. 일찍 죽음과 장수함을 다른 것이라 여기지 않고, 자신을 닦아 기다림이 천명을 세우는 것[立命]이다.”(「진심盡心」상)

삶과 죽음의 문제에 어찌 정답이 있을까마는, 주어진 하루의 삶을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로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기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사생(死生)을 넘어 오늘을 사는 길이리라.

글 이선경(조선대 초빙객원교수・한국주역학회 회장)

*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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