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 양극화보다 심각한 정서 양극화[시평]
국회의원의 재선 욕망은 당연
생계와 직결된 경우 사생결단
험지출마 거부 당적변경 불사
여론 조작用 정치적 동원 심각
직업정치인 늘수록 더 악성화
국민이 각성해야 정치가 산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이상적인 지도자로 지식과 지혜를 가진 철학자를 꼽았다. 막스 베버는 저서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인은 열정, 책임감 그리고 균형적 판단의 3가지 자질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분명히 정치 지도자에게 필요한 기준이다. 그러나 정치인들에게 이러한 자질을 기대하는 것은 현실 정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 비난하는 근거로 사용된다.
미국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R 메이휴는 이미 50년 전에 규범론 대신에 실증적 시각을 제시했다. 가치를 개입시키지 말고 있는 그대로 현실을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는 미국 의회를 연구하면서 선출직 정치인들은 모두 재선을 우선시하는 집단이라고 간주하고 의원들의 정치 행태를 분석했다. 의원들의 정치 활동은 의정 활동 보고회와 같은 홍보, 민원 해결과 예산 따내기 등 지역구 돌보기, 그리고 의회 투표와 연설 등 정치적 입장 표명이라는 3가지 범주로 분류된다. 그리고 이 모든 정치 활동은 재선을 포함한 자신의 정치 역량을 높이려는 목적에서 이뤄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미국 정치인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의 모든 선출직 정치인에게 적용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재선 목적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재선이라는 동기만으로 정치인들의 의사결정과 행동을 모두 설명할 순 없지만,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행위 동기임은 분명하다.
현재 대다수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는 하나의 직업이 됐다. 직업정치인들은 국가에 봉사하기 위해 정치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치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의원직을 유지해야 상당한 수준의 보수와 사회적 명예를 누릴 수 있다. 따라서 직업정치인들에게 재선이 절실한 목적임은 당연하며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
선거를 앞두고 탈당하거나 당적을 옮기는 것도 당선 가능성을 키우기 위한 전략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소속 정당을 옮기면 소신 없는 ‘철새 정치인’이란 비난을 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재선 동기를 가진 정치인은 그런 부정적 평가로 인해 잃는 표보다 새로 얻을 수 있는 표가 더 많을 것이란 계산이 선다면 당적 변경을 선택하는 것이다.
언제나 정당 내에서 당내 갈등이 가장 심해지고 계파가 위력을 발휘하는 시기는 공천이 결정되는 그즈음이다. 이 모든 것이, 정치가 직업이기 때문에 직업을 잃지 않으려는 정치인들의 노력 산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재선 목표라는 개념을 바탕에 두면 정치인들 행태의 대부분이 설명된다.
현직 의원들에게 내년 4·10 총선에서 소속 정당이 승리하는 것과 본인이 당선되는 것 중에 어떤 쪽이 더 중요한지를 물어보면 의원들은 서슴없이 자신이 금배지를 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답한다. 이들에게 직업을 잃는 것만큼 끔찍한 일은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중진 의원들에게 험지 출마나 불출마를 요구하며 당을 위해 희생하라고 주문하는 국민의힘 혁신위원회가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은 일견 당연하다.
직업정치인들이 공적 사명감 없이 자기 이익에만 매달린다는 사실에 실망하거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정치인들이 일반 국민보다 더 도덕적이거나 애국적이라고 기대한 적이 없다. 국가를 위해 이 한 몸 바치겠다는 정치인의 출마의 변을 액면 그대로 믿은 적도 없다. 중요한 것은, 재선 욕구를 가진 정치인들을 국민이 주도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지 여부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가 제대로 작동하면 국민을 대변하는 정치인을 선출할 수 있다. 재선 욕구를 가진 정치인들은 선거 승리를 위해 유권자의 지지가 필수이기 때문에 국민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만족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문제는, 여론에 반응하는 게 아니라 여론을 만들려는 시도도 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것이 정치 양극화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는, 이념적 양극화가 아니라 정서적 양극화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그리고 정서적 양극화는 정치인들의 정치적 동원의 결과다. 그동안 우리 정치는 국민이 주도하는 게 아니라 정치인들이 구조화하고 국민은 그에 추종하는 상황이었다. 직업정치인이 늘수록 국민이 바뀌어야 정치가 산다는 주장을 다시금 되새겨봐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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