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광장] 기준과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를 바라며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의 정책적 의사결정에 있어 현장이나 전문가의 의견보다는 지도자의 개인적 견해가 더 중요해진 느낌이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고 그것이 여론의 반향을 불러일으키면 그에 대한 지도자의 언급이 '지시'로 받아들여지고 실무진들은 그것을 이행하기 위해 때로는 기준과 원칙을 벗어나는 일도 행하는 듯하다.
필자의 외조부는 일제시대에 항일운동을 하다가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광복으로 풀려났다. 같이 투옥된 동료는 옥사했으니 광복이 되지 않았다면 필자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는데 2년 전 같은 묘역에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안장되었다. 교과서에서 봤던 유명한 독립운동가의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와 옆에 안장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원래 휴게공간이 있던 자리에 묘가 조성되었고 다른 묘들과 달리 양옆에 여유 공간을 둔 독립묘 형태이며 비석의 필체가 달랐다. 당시에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후 청와대 지시에 따라 안장 순서대로 묘지를 써야 한다는 국립대전현충원의 기준을 어기며 특별한 곳에 위치를 선정했고, 이장 애국지사의 경우 1평형으로 안장한다는 운용지침을 급히 개정하기까지 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일은 특정 정권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닌 것 같다. 소아진료 대란이 일어나자 대통령이 어린이병원을 방문하여 현장 간담회에서 어떤 재원도 아끼지 말고 아이들 건강을 위해 지원하라고 지시했다. 국정 운영의 최고 책임자가 현장의 어려움을 듣고 이에 대한 해결 의지를 피력한 것은 긍정적인 일이다. 그러나 책임자의 말이 사전에 실무진들과 조율된 것인지 우려스럽다. 여러 분야가 복합적으로 맞물려 있어 문제가 생긴 한 쪽을 건드리면 다른 쪽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것이 정책이기 때문이다. 특정 분야에만 지원을 몰아준다면 당장 겉으로 문제가 크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힘들게 버티고 있는 다른 분야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전에도 의료계에서는 어느 유력자의 사위가 그 분야를 전공한 의사라서 수가가 높다거나 어느 유력자의 가족이 그 병을 앓아서 특정 질환에 대한 정책적 지원과 연구 예산이 집중되는 일 등이 있었다.
전문가와 실무자들의 의견을 들은 후 구조적, 체계적 논의를 통해 결정되어야 할 내용들이 책임자의 개인적 경험이나 관점에 따라 결정된다면 기준과 원칙은 온데간데없게 된다. 이런 방식의 의사결정이 이어지면 기존 체계 내에서 합리적 주장을 정상적인 절차를 통해 제기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 보다는 위에 있는 힘 있는 사람만 설득하면 요구사항을 관철할 수 있다는 인식이 생기게 될 것이다.
국가뿐만 아니라 조직 단위의 의사결정도 책임자의 성향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책임자가 바뀌면 이전 책임자가 추진했던 일들은 상당부분 폐기된다. 책임자 교체 외에는 상황이 달라진 것은 없는데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는 것인가. 누가 보더라도 잘못된 결정은 바로잡는 것이 맞지만 단지 내가 추진한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정책 방향이 달라지면 조직 구성원들은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다. 조직은 그 책임자의 소유물이 아니다. 책임자는 임기 동안 권한을 위임 받아 조직을 위해 무엇이 최선인가를 생각하여 조직을 운영해야 하고 임기가 끝나면 후임자에게 그 자리를 물려줘야 한다.
오래 전 탈북하여 국내에 정착한 전 북한 고위급 외교관이 우리나라에 진보정권이 들어섰을 때 탈북민에 대한 정책 변화를 걱정하는 탈북민들을 안심시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이기 때문에 누가 권력을 잡든 그 권력자 마음대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법과 원칙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이므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25년 전 외부인이 느꼈던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사회가 과연 그 때보다 더 발전해온 것일까.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면서도 기준과 원칙에 따라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바란다. 나현욱 세종충남대병원 신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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