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508] 파리 엑스포의 한국관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2023. 12. 5.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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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 미상, 파리 만국박람회의 한국관 전경 사진, 1900년.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엑스포)에 건립된 한국관 사진이다. 경복궁 근정전을 본떠 지은 2층 전각으로 팔작지붕과 처마에 올린 괴수 모양의 잡상 등 전체적으로 위용을 갖추기는 했지만 우리 눈에 조금 낯설다. 근정전에 비해 세로가 길쭉한 비례에다, 무엇보다도 처마끝이 너무 급하게 치켜올라간 탓이다. 설계를 맡았던 프랑스 건축가 외젠 페레(Eugène Ferret·1851~1936)는 당시 프랑스령이던 베트남 사이공에 오페라 하우스를 짓는 등 아시아권 문화에 대한 경험이 있었다. 처마의 경사가 심한 베트남 사원을 보면 페레의 한국관에 베트남 건축의 영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파리 만국박람회는 우리나라가 1893년 시카고에 이어 두 번째로 참가한 엑스포다. 1893년에 조선의 왕이었고, 1900년에는 대한제국 황제였던 고종은 박람회를 통해 국제 사회에 독립국으로서 우리나라의 존재를 널리 알리고자 했다. 그러나 전시관 설립에 대한 전권을 쥔 건 프랑스의 그레옹 남작이었다. 당시 대한제국은 파리에 전시관을 지을 만한 재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첫 삽을 뜨자마자 그레옹 남작이 갑작스레 사망했다. 한동안 표류하던 한국관 설립은 당시 프랑스 식민지 콩고에서 사업을 하던 미므렐 백작이 이어받았고, 고종은 관리 민영찬과 목수 두 명을 파리로 보냈으나 그들의 역할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명확지 않다.

동양의 신비로운 작은 나라 한국은 조화로운 색채의 비단과 단아한 도자기, 정교하고 세밀한 나전칠기 등 세련된 공예품으로 서양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그러나 곧이어 대한제국은 국권을 잃었다. 아름다운 물건들이 나라를 지켜주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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