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 사망 60%가 중소사업장인데…" 중처법 확대 재유예에 노동계 당혹
당정 유예 방침, 민주당 동조 기류 비판
전문가들 "정부 산재 줄일 의지 있나"
정부ㆍ여당이 산업재해가 무더기로 발생하는 근로자 50인 미만 사업장(중소기업)에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을 또 미루는 방안을 추진하자 노동계는 당혹해하는 분위기다. 정부는 “중소기업이 아직 중대재해법 시행을 준비하지 못했다”며 법 적용을 미루자는 입장인데, 노동계는 “어떤 핑계도 노동자 생명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경제계 표심'을 의식한 민주당도 법 개정을 승인하려는 태도여서 법 적용을 둘러싼 정치권과 노동계와의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4일 노동계에 따르면 중대재해법은 2018년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한 24세 청년 노동자 김용균씨 사고를 계기로, 연간 2,000명이 산업재해로 숨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악의 산재 후진국’이라는 오명을 벗자는 사회적 합의의 소산이다. 사망 사고 등 중대 산재가 발생했을 때 안전 조치를 소홀히 한 경영책임자를 1년 이상 징역 또는 10억 원 이하 벌금형에 처하는 것이 골자다. 2021년 제정돼 지난해 1월 50인 이상 기업(중견ㆍ대기업)에 먼저 적용됐고, 50인 미만 사업장(건설업은 공사금액 50억 원 미만 사업장)은 3년 유예기간을 거쳐 내년부터 적용한다는 부칙을 뒀다.
하지만 전날 국민의힘과 정부, 대통령실은 고위당정협의회에서 “50인 미만 기업에 대한 중대재해법 적용을 2년 더 미루도록 법을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정부ㆍ경영계는 중소기업의 열악한 현실을 배려해 법 적용을 미루자는 입장이다. 고용부 관계자는 “중대재해법 시행에 대비하기 위해 정부가 전체 중소기업 82만 곳을 대상으로 컨설팅, 기술지도 등 지원에 나섰지만 올해까지 40만 곳밖에 못 했다”며 “나머지 40만 개 기업에 한 번이라도 지원을 해주려면 2년은 더 필요하다”고 했다. 경영계도 “50인 미만 기업에 중대재해법이 적용되면 오너 범법자가 양산되고 폐업이 줄을 잇는다”고 우려한다.
노동계는 당황스럽다는 입장이다. 산재 사망자의 60% 이상이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나오는데 노동자 안전을 주관하는 고용부가 ‘기업의 어려움’을 이유로 안전 보장을 미루자고 나선 형국이라는 것이다. ‘고용부가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정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최명선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실장은 이날 기자간담회를 열고 “매년 700명 이상이 죽어 나가는 50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 생명과 안전은 민생이 아닌가”라며 “중소기업 지원은 법과 거래할 대상이 아니라, 법 적용과 함께 추진해야 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준비 소홀을 지적했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소속 최민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는 “고용부에 정말 산재를 줄이려는 의지가 있었다면 중소기업 컨설팅을 하더라도 건설업ㆍ금속업 등 사고가 많은 업종부터 준비시켰어야 했다”고 말했다. 이윤근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소장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고용부는 앞으로 2년 동안 노동자들의 생명이 위협받아도 된다고 말한 것”이라며 “정부는 ‘기업이 힘들어한다’고 했는데 실제로 어떤 부분이 힘든지, 정말 중대재해법 적용 준비가 안 된 건지 구체적 설명도 없다”고 꼬집었다.
당정 방침대로 중대재해법 확대 적용을 유예하려면 부칙 개정 등이 필요하다. 국회 다수당으로 입법 작업의 ‘키’를 쥔 더불어민주당은 조건부로 유예를 승인하려는 분위기다. 홍익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최고의원회의에서 “정부의 공식 사과, 분기별 준비 계획, 2년 후 반드시 시행하겠다는 정부와 경제단체의 입장 표명이 있으면 법 유예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고 했다.
노동계에서는 "민주당이 총선을 앞두고 경영계 표심을 고려해 여당과 정치 거래에 나선 것"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홍 원내대표에게 노동계 입장을 전달하려는데 만남에 응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5일 국회 앞에서 법 적용 유예 연장을 규탄하는 집회를 여는 등 실력행사에 나설 예정이다.
정지용 기자 cdragon2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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