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소음 최대한 잠재운 詩예요"
백지 등 선명한 이미지로
패르트의 미니멀음악 같은
무음과 무언어 세계 그려내
문학이 예술의 왕으로 불리는 것은 언어가 시각, 청각, 촉각 등 인간의 모든 감각을 표현할 수 있어서 일 것이다. 뛰어난 묘사와 이미지(문장을 읽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감각)는 그 자체로 쾌감을 주고, 독자로 하여금 사물과 세계를 낯설게 느끼게 한다. 4번째 시집 '하얀 사슴 연못'(창비)을 최근 출간한 황유원 시인(사진)의 시들이 그렇다. 와인 잔 속에 갇힌 그리마('구경거리'), 물웅덩이 표면에 왕관 모양으로 피어나는 빗자국('블루스를 부를 권리') 등 대상에 대한 탁월한 묘사를 선보였던 황유원은 이번 시집에서도 "차갑도록 환하고 환하도록 차가운"(조강석 문학평론가) 아름다운 이미지를 구사한다.
겨울과 백발, 텅빈 성당 등 시집 속 대상들이 구현하는 것은 흰 눈처럼 세상을 덮는 고요다. '꿈에 백발이 되었다/머릿속에 흰/눈이 내리고 있었다'('백지상태') 등 하강적 이미지와 '오후 두시의 대성전에는 아무도 없고/다만 돌들이 서로 몸을 붙여/물 샐 틈 없는 고요를 만들어주었음'('불광동성당')과 같은 감각의 전이(청각의 시각화)는 소란스러운 삶에 지친 독자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1년4개월 먼저 출간된 직전 시집 '초자연적 3D 프린팅'(문학동네)이 현대 사회의 소음을 오히려 증폭한 세계를 그렸던 것과 반대의 길이다.
'하얀 사슴 연못'과 '초자연적 3D 프린팅'은 황유원이 하나의 프로젝트로 구상한 쌍둥이 시집이다. 2013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황유원은 첫 번째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민음사·2015년 김수영문학상 수상 시집)를 낸 뒤 두 시집을 동시에 구상하고 쓰기 시작했다. 황유원은 "LP 음반의 더블앨범처럼 하나의 콘셉트 안에서 쌍을 이루는 두 개의 시집을 내고 싶었다"며 "존재의 소음을 최대한 증폭시킨 것이 '초자연적 3D 프린팅'이고 최대한 잠재워본 것이 '하얀 사슴 연못'이다"고 밝혔다.
'당신 안에서 쉬기 전까지, 우리 마음은 정처 없습니다'(아우구스티누스)는 첫 장의 인용문과 '그리고 우리는 하늘의 계단을 오르리'('신비한 로레토 교회') 등의 표현처럼 시집에는 그리스도교적 이미지가 많다. 직전 시집이 '내가 저기도/여기도/있게 되는구나'('표절'), '가끔, 천수천안의 손에 펜을 쥐어주고'('사이키델릭')와 같은 불교적 이미지를 사용한 것과 대조된다. 황유원(서강대 종교학과 졸업·동국대 인도철학과 박사과정 수료)은 "종교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종교들이 품은 풍성한 이미지, 극단과 극단을 오가는 세계관을 좋아한다"며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더 좋아하지만 이들 종교의 언어는 한국화가 되지 않아 시로 옮기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설명했다.
'하얀 사슴 연못'은 정지용 시인의 시집 '백록담'(1941)을 오마주(존경하는 작품의 일부를 차용하는 것)한 시집이기도 하다. '백록담이라는 말에는 하얀/사슴이 살고 있다' '머릿속은 청량해진다/연못에 잠시 생각의 뿔을 담갔다/빼기라도 한 것처럼'('하얀 사슴 연못')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시집은 '백록담'에 나왔던 백색, 사슴, 연못의 이미지를 활용하면서도 황유원만의 개성을 드러낸다. 그것은 "쉽고 평이해 보이지만 독자를 끌어당기는 매혹적인 힘"(2022년 현대문학상 심사평)이고 "오롯이 자신의 내면에서 갈고닦은 언어와 서정…맑고 투명한 시혼"(2022년 현대문학상 심사평)이다. 황유원은 "'백록담'에는 미니멀하고 깨끗한 세계, 그리스도교적 이미지가 있었다"며 "이것이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와 맞는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시집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요소 중 하나는 사물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시인의 시선이다. '지우개를 한번 갖다댈 때마다/흰/공터가 생겨나고'('백색소음'), '실수로 건드린 유리잔이 울린다/순간 영혼이 생겨났다/사라지는 느낌으로'('유리잔 영혼') 같은 문장은 독자의 머릿속에 선명한 이미지를 떠오르게 해 지적이면서도 정서적인 힘을 일으킨다.
황유원은 이번 시집을 현대음악, 특히 아르보 패르트의 미니멀리즘 음악의 영향을 받으며 썼다고 밝혔다. 단순한 화성과 리듬을 특징으로 하는 패르트의 음악처럼 차분하고 고요한 세계를 그리려 했다는 것이다. 황유원은 "세상의 소음을 감싸는 패르트의 음악처럼 소리가 잦아든 무음의 이미지, 언어가 사라진 무언어의 감각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김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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