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조우'와 '복안'은 어떻게 상투어가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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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해야 할 곳은 '조우'다.
하지만 더 본질적인 오류는 이 문맥에서 '조우' 자체가 적절치 않은 말이라는 점이다.
'복안'도 아무데나 무심코 쓰지만, 제대로 쓰는 말인지 따져볼 만하다.
'복안(腹案)'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마음속 생각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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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불어민주당은 윤석열 대통령의 잦은 해외 순방에도 성과가 미흡하다고 주장했다. 윤 대통령이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를 계기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조우했음에도 한중 정상회담이 불발된 일을 탓한 것이다.
주목해야 할 곳은 ‘조우’다. 흔히 쓰는 말이지만, 잘못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조우(遭遇)’란 무엇일까. ‘조(遭)’와 ‘우(遇)’ 모두 ‘우연히 만나다’란 뜻을 나타내는 글자다.
‘조우=우연한 만남’… 아무 데나 쓰면 곤란
두 글자에 공통적으로 쓰인 ‘쉬엄쉬엄 갈 착()’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책받침변’으로도 불리는 이 글자는 사람이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즉 “길을 가다 A와 B가 조우했다”는 의미로, 예기치 않게 만났을 때 쓰는 단어가 ‘조우’다. 흔히 하는 말 중에 “조난(遭難)을 당하다”,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다”라고 할 때 각각 ‘조’ 자와 ‘우’ 자가 쓰였다. ‘항해나 등산 따위를 하는 도중에 재난을 만나는 것’이 ‘조난’이다. ‘천 년 동안 단 한 번 만나다, 즉 좀체 만나기 어려운 좋은 기회를 이르는 말’이 ‘천재일우’다.
그러니 예문의 표현이 왜 잘못됐는지 자명하게 드러난다. ‘우연히 만났다’고 해놓고 어찌 정상회담을 기대한다는 말인가. 정상회담이 불발된 것을 탓할 수 없는 상황인 셈이다. 하지만 더 본질적인 오류는 이 문맥에서 ‘조우’ 자체가 적절치 않은 말이라는 점이다. 국제회의 석상에서 어느 두 나라 정상이 “회의 장소에 들어가면서 조우해…” 식으로 설명하는 기사 문장이 의외로 많다. 정상 간 만남은 설령 잠깐이더라도 사전에 동선을 설정해 움직이는, 의도된 만남일 텐데 이를 조우한다고 표현하는 것은 곤란하다. 아마도 정확한 뜻을 모른 채 단순히 ‘짧은 만남’이란 뜻으로 이 말을 쓰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다 상투어가 됐을 것이다. 윤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의 만남 역시 짧은 만남이었지만 예정된 일정에 따른 것이니 ‘조우’가 아니다.
만남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상황에 따라 단어를 구별해 써야 한다. 우연한 만남을 가리키는 조우를 비롯해 단순히 서로 만나는 것은 ‘상봉’(이산가족 상봉)이라고 한다. 일정한 목적으로 여럿이 한데 모이는 것은 ‘회동’(여야 대표 회동)이다.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뜻밖에 다시 만나는 것은 ‘해후’(감격적인 해후)라고 한다. 이들을 모두 아우르는 말은 ‘만남(만나다)’이다. 이렇게 비교해보면 우리 고유어가 가장 편하고 친근한 말이란 게 드러난다. 글쓰기에서 단어의 정확한 쓰임새를 잘 모르면서 굳이 한자어를 쓰는 것은 오로지 잘못된 습관 탓이다.
‘복안’은 드러나지 않은 마음속 생각
#. 금융당국이 5대 시중은행 중심으로 굳어진 과점 체제를 깨기 위해 ‘신규 플레이어’ 진입을 적극 유도하기로 했다. 판을 흔들 ‘메기’를 통해 경쟁을 유도하겠다는 복안이다. (중략) 5일 금융위원회는 이런 내용을 골자로 한 ‘은행권 경영·영업 관행·제도 개선ㅡ방안’을 발표했다.
‘복안’도 아무데나 무심코 쓰지만, 제대로 쓰는 말인지 따져볼 만하다. ‘복안(腹案)’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마음속 생각을 말한다. “나한테 복안이 있다”, “너의 복안은 무엇이냐” 식으로 쓴다. 유념해야 할 것은 밖으로 드러나는 순간 그것은 ‘복안’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미 방침이 다 서고, 밖으로 공식 발표해 언론에 보도되는 상황인데도 이를 ‘복안’이라고 한다. 잘못 알고 쓴 말이 습관이 되고, 이게 굳어져 상투적 표현이 된 것이다.
언론에서 ‘복안’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대략 1990년대 들어서인 것 같다. 예전에 마음속 생각, 계획을 가리키는 말로는 ‘심산(心算)’이 좀 더 일상적이었다. 이 말 역시 속마음이라 드러나지 않은 생각이다. “나는 그를 애태울 심산으로 일부러 새침하게 굴었다”처럼 쓴다. 순우리말로 하면 ‘속셈’이다. ‘심산’이든 ‘속셈’이든 딱히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대개 부정적 뉘앙스로 이 말을 쓴다. 신문 언어로 ‘복안’을 많이 사용하게 된 데는 그런 까닭이 있는 것 같다. 그래도 ‘복안’의 요즘 쓰임새는 본래 의미와 너무 동떨어져 있다. 드러난 생각에는 ‘계획’이나 ‘방침’ 정도를 쓰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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