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중지 도왔다고 죄인 됐지만, 활동 결코 멈추지 않을 것”

오세진 2023. 12. 4.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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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중지권]한겨레·국제앰네스티 공동기획 인터뷰
유스티나 위드진스카 폴란드 페미니스트 활동가
폴란드에서 여성들의 안전한 임신중지 권리 보장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 ‘임신중지 드림팀’(Abortion Dream Team)을 설립한 유스티나 위드진스카 활동가(왼쪽)와 김선혜 이화여대 교수가 지난달 23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대담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2016년 10월 중순, 검은색 옷을 입은 여성들이 서울 광화문 등에서 ‘낙태죄’ 폐지를 외쳤다. ‘검은 시위’라고 불린 이 시위의 시작은 불과 2주 전 폴란드였다. 당시 폴란드 집권당인 ‘법과 정의당’이 임신중지를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법안을 추진하자, 폴란드 여성들이 생식권에 대한 애도의 의미로 검은 옷을 입고 거리로 나온 것이었다.

유스티나 위드진스카(49)는 ‘검은 시위’가 일어난 2016년 10월, 폴란드에서 ‘임신중지 드림팀’(Abortion Dream Team·ADT·에이디티)을 만들어 임신중지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지우는 한편, 임신중지를 원하는 여성을 지원하고 있다. 한겨레는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의 도움을 얻어 지난달 23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 본사에서 유스티나를 만났다. 성·재생산권을 주로 연구해온 김선혜 이화여대 교수(여성학과)도 함께했다.

한 해 4만명 이상 임신중지 지원

“아니아(가명)는 물만 마셔도 토할 만큼 입덧이 굉장히 심했고, 남편의 지속적인 가정폭력으로 정신건강도 나쁜 상태였다. 결국 임신 7주차에 의사에게 임신중지 시술을 요청했지만 묵살당했다. 남편의 감시, 코로나19 확산 탓으로 다른 나라에서 시술받는 것도 어려웠던 아니아를 도울 수밖에 없었다.”

유스티나는 2020년 2월 임신 12주차였던 아니아에게 임신중지약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폴란드 형법은 의사가 아닌 사람이 임신부의 임신중지를 도우면 징역 3년 이하에 처한다. 때문에 에이디티도 임신중지약을 직접적으로 제공하는 대신 임신중지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왔었다. 하지만 유스니타는 자신의 행동이 ‘불법’임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결국 이 건으로 유스티나는 기소돼 올해 3월 1심 법원에서 8개월 사회봉사(총 240시간) 판결을 받았다.

유스티나는 2019년부터 다른 단체와 함께 ‘국경 없는 임신중지’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매년 4만명이 넘는 여성의 임신중지를 지원하고 있다. 임신중지 정보를 제공하거나, 다른 나라에서 임신중지 시술을 받을 수 있도록 비용을 지원한다. 지원받는 여성 대부분은 폴란드인으로, 러시아 전쟁을 피해 우크라이나를 탈출한 여성(난민 포함)도 있다.

폴란드는 임신중지를 엄격히 통제하는 국가다. 1993년부터 시행된 임신중지 규제법은 △임신이 임산부의 생명과 건강을 위협할 때 △태아의 생명을 위협하는 심각하고 회복 불가능한 결함 및 불치병이 태아에게 있을 때 △임신이 성폭력, 근친상간 등 불법행위에 의한 것일 때에 한해 의사에 의한 임신중지 시술을 허용한다.

2016년 ‘임신중지 드림팀’ 창립하고
‘국경 없는 임신중지’ 프로젝트로
매년 4만여명에게 관련 정보 제공
폴란드, 임신중지 엄격히 통제
다른 나라서 시술 등 임신중지 지원

올해 1심서 240시간 사회봉사 판결
“임신중지는 인권문제, 찬반대상 아냐”

폴란드 헌법재판소는 2020년 10월 태아에게 심각한 결함이 있을 때 임신중지 시술이 가능하도록 한 임신중지 규제법 조항마저도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이후 현재까지 최소 7명의 여성이 응급 상황에서 임신중지 시술을 받지 못하고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인원도 미디어를 통해 알려진 인원이라,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이 유스티나의 말이다.

그는 “태아에게 이미 심각한 결함이 있어 의료적 개입을 하더라도 태아를 살릴 수 없었지만, 의사들이 임신중지 시술을 하지 않고 태아가 자연적으로 죽기까지 기다리다 결국 산모들이 사망했다”고 말했다. 실제 2021년 9월 임신 22주차였던 30살 여성이 조기 양막파수로 입원했지만, ‘뱃속 태아가 살아 있다’는 이유로 의료진이 산모를 제때 치료를 하지 않아 결국 패혈성 쇼크로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일로 분노한 수만 명의 시민이 거리로 나와 ‘더는 안 된다’는 구호를 외쳤다.

김선혜 교수는 “임신중지권을 포함한 성·재생산 권리 개념이 인권으로 여겨지지 않고, 오랫동안 국가의 강압과 강제에 의해 통제될 수 있다고 여겨져 온 점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임신중지는 개인의 권리로서, 국가의 허락을 받을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보호해야 할 기본권”이라고 말했다.

폴란드에서 여성들의 안전한 임신중지 권리 보장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 ‘임신중지 드림팀’(Abortion Dream Team)을 설립한 유스티나 위드진스카 활동가(왼쪽)와 김선혜 이화여대 교수가 지난달 23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대담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한국도 임신중지권 보장 답보 상태

임신중지권이 보장되지 않는 현실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2019년 4월 헌법재판소가 형법상 ‘낙태죄’ 조항을 헌법불합치라고 결정했으나, 4년째 후속 입법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지난달 22일 열린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도 임신중지 권리 보장 내용을 담은 모자보건법 개정안은 통과되지 못했다.

정부의 방침은 여성의 바람과 반대로 간다. 여성들은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해 유산유도 제(임신중지약)를 도입할 것을 주장했으나, 법원은 올 10월 한국 정부(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임신중지를 희망하는 여성들에게 임신중지약을 배송해주는 국제 비영리단체 ‘위민 온 웹’ 누리집 접속을 차단한 조치가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폴란드에서 여성들의 안전한 임신중지 권리 보장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 ‘임신중지 드림팀’(Abortion Dream Team)을 설립한 유스티나 위드진스카 활동가(왼쪽)와 김선혜 이화여대 교수가 지난달 23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대담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김선혜 교수는 “유산유도제는 세계보건기구(WHO)에서도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했고, 여러 나라에서 안전성이 입증됐는데도 정부가 막고 있다”며 “(정부의 방치 속에) 임신중지를 원하는 여성들은 온라인의 부정확한 정보에 노출되거나 비싼 값에 구입한 약을 불안한 마음으로 복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러 악조건 상황에서도 희망은 있다. 지난 10월 폴란드 총선에서 보수정당인 ‘법과 정의당’이 하원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하자, 유스티나는 일부 야당과 함께 지난달 말 임신 주수에 상관없이 임신중지를 완전히 비범죄화하는 법안과 임신 12주차까지 조건 없이 임신중지를 허용하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야당 일각에서 임신중지 비범죄화에 반대하고 있어 법안 통과를 낙관할 수는 없다. ‘제3의길’ 당은 이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의하자는 방안을 내놓기도 했다. 유스티나는 “임신중지권 보장은 인권의 문제”라며 “과연 인권이 국민투표를 통해 다수결로 찬반을 물어야 하는지 의문이고 그것 자체가 비상식적”이라고 말했다. 이어 “안전한 임신중지 권리 보장과 임신중지 비범죄화 논의가 계속 진행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목표가 실현될 때까지 저는 제 활동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는 ‘2023 편지쓰기 캠페인(Write for Rights)’을 통해 폴란드 검찰총장에게 유스티나 활동가에 대한 혐의를 즉시 취하할 것을 요구하는 탄원을 진행하고 있다.

유스티나의 유죄 판결에  항의하는 탄원 주소

https://www.hani.co.kr/arti/society/women/111891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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