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과학자를 문책·배상 공포에서 해방시키자

천영우 前 청와대 외교안보수석·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 입력 2023. 12. 4. 03:1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연구보다 감사받는 게 더 힘들다” 국방과학연구소 고백 놀라워
무인정찰기 평가 중에 추락하자 연구자들 50억 배상 요구받기도
ICBM 정찰위성 가상화폐 등 최근 北 특정 분야 놀라운 도약
과학자 우대 및 면책제도 덕분… 북 과학기술정책도 배울 게 있다

북한은 특정 과학기술 분야에서 놀라운 도약을 이루고 있다. 지난 7월 고체 연료를 사용한 화성-18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의 시험 발사에 이어, 지난달 21일에는 군사정찰위성 “만리경-1호” 발사에도 성공함으로써 핵·미사일의 기술적 고도화와 함께 표적 정보를 수집할 체제까지 갖추어가고 있다. 사이버 분야에서도 북한은 해킹으로 해외 방산 업체의 첨단 군사기술을 훔쳐왔고 2022년 중 가상 화폐 시장에서만 17억달러를 탈취(유엔 안보리 산하 대북제재 전문가 패널 보고)하는 비범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기본적 민생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최빈국 대열의 경제력으로 이런 성과를 거둔 비결은 무엇일까?

첫째, 최고의 이공계 영재들을 과학기술자로 양성하고 전략적으로 가장 중시하는 분야에 배치해온 북한의 정책과 시스템이다. 남한에서라면 의사가 되거나 정보통신·게임 업체에서 소프트웨어를 만들 이공계 인재를 북한에서는 과학기술자로 키워 원자력총국, 미싸일총국, 국가항공우주기술총국, 정찰총국 등에 배치하여 부여된 임무에 전념토록 한다. 개인이 직업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 나라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둘째, 과학기술자를 특별히 우대하는 제도와 정책이다. 김정은이 2016년 7차 당대회에서 “과학자, 기술자들을 귀중히 여기고 내세워주며 그들이 과학 연구 사업에 전심할 수 있도록 사업 조건과 생활 조건을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교시’를 내린 바 있는데 이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미 시행해온 정책을 재확인한 것이다. 극심한 경제난 속에서도 평양의 요지에 최고급 주상 복합 아파트 19동과 150개의 부대 시설을 갖춘 ‘미래과학자 거리’를 2015년에 완공한 것이 과학기술자에 부여하는 특권적 지위를 보여준다.

끝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연구·개발 과정에서의 실패를 문책하지 않는 북한 특유의 관행이다. 지난 6월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5월 31일 1차 정찰위성 발사 실패에 대해 “일꾼들의 무책임성이 신랄하게 비판됐다”는 노동신문 보도가 있었지만 문책당한 간부는 없었다. 시행착오를 성공에 이르는 필수 과정으로 인식하고 실패하더라도 과학기술자들의 기를 꺾지 않고 성공할 때까지 연구·개발에 집중할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 북한의 가장 큰 힘이다.

대한민국이 북한에서 배워야 할 것은 실패에 대한 관용의 문화다. 실패에 대한 공포가 국책연구기관의 연구·개발을 위축시키는 주범이다. 예컨대,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 2002년 최초 우주발사체 “나로호”(KSLV-1)의 개발에 착수하면서 거금을 들여 1단 로켓 완제품을 러시아에서 도입하기로 한 것은 1차 시험 발사에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의 산물이었다. 실패하면 예산과 인력이 대폭 삭감될 것이라는 실존적 공포 때문에 쉬운 길을 선택했다가 결국 2013년 3차 발사에서 성공할 때까지 과도한 예산과 시간을 낭비한 것이다. 물론 나로호 개발 과정에서 축적한 경험과 기술이 지난 5월 “누리호”(KSLV-2)의 3차 발사 성공에 밑거름이 되었지만 1단 로켓 완제품 도입에 들어간 예산으로 10번 정도의 발사 실패를 각오하고 처음부터 독자 개발을 추진했다면 누리호 발사에 성공하기까지 21년이나 걸렸을까?

국방과학연구소(ADD)도 첨단 무기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많은 곤욕을 겪었다. 2010년 북한의 연평도 포격을 계기로 2011년에 ‘번개 사업’으로 착수한 북한 장사정포 파괴용 전술지대지미사일(KTSSM) 개발이 당초 계획보다 수년이나 지연된 것은 시험 발사에서 드러난 성능 미흡을 이유로 외부 감사를 받는 데 관련자들이 너무 시달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개발을 주도한 책임자들에 의하면 KTSSM 개발보다 감사를 받는 것이 더 힘들었다고 한다. 또한 3년 전 ADD가 개발한 중고도 무인 정찰기 시험평가 과정에서 1대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개발에 참여한 연구자들에게 50억원 이상의 배상을 청구한 황당한 에피소드도 있다. 연구자들의 사기를 꺾는 이러한 풍토 속에서도 ADD가 북한의 핵·미사일 기지를 일거에 파괴할 현무-4까지 개발한 것은 연구자들의 개인적 열정과 헌신이 만들어낸 기적이다.

정부가 국책연구소의 연구·개발을 지원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문책의 공포에서 연구자들을 해방시켜주는 것이다. 연구·개발 참여자를 면책하는 제도의 도입도 시급하다. 무기 체계의 경우 최신 기술을 이용한 모든 시제품은 불량품에서 시작한다. 미국도 굿 이너프(good enough)면 실전 배치부터 하고 바로 성능 개량에 착수하여 기술적 완성도를 높여나간다. 미국의 최신 전투기 F-35가 아직도 결함투성이인 이유이기도 하다.

Copyright©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