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천 칼럼] 학현 변형윤 선생을 기리며
불평등·불의 타파해 삶의 질 높이고
기후위기 대응이 시급하다면서
사회생태적 대안경제의 길 제시한
학현경제학 영혼은 우리 곁에 숨 쉴 것
학현 변형윤 선생과 첫 인연이 시작된 것은 1972년 어느 봄날이었다. 나는 엉뚱한 일로 학장실에 불려가 선생과 첫 대면을 하게 되었다. 학생교지 ‘상대평론’에 기고한 나의 글이 말썽이었다. 선생의 손에 원고 교정지가 들려 있었다. “군이 형을 닮아 겁이 없고 당차구나.” 뜻밖의 말씀이었다. 겁먹고 주눅들어 있었는데 꾸지람은커녕 칭찬 조의 말씀을 하신 것도 의외였고 나의 형을 알고 계신 것도 놀랍기만 했다.
문제의 원고 내용은 교수들의 강의가 구태의연하고 영 재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학부 2년차 당시에 형이 물려준 뮈르달의 <경제이론과 저개발지역>이라는 책을 읽고 뭔가 뭉클한 감동을 받았고 그만큼 강의에 대한 기대도 컸었다.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은 나머지 당돌하게도 그런 철부지 글을 썼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식은땀이 흐른다. 학현 선생이 학장이었으니 망정이지 곤장을 수십대 맞을 일이었다.
뮈르달은 마셜과 더불어 선생이 자신의 경제사상 기반으로 삼았던 큰 학자였다. 선생은 <경제이론과 저개발지역>에 대해 발전경제학 분야에서 2차 대전 후에 나온 책 중 최우선으로 꼽아야 할 책이라 할 만큼 높이 평가했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 나는 뮈르달의 책을 진지하게 다시 읽고 이에 언급하는 글을 쓰기에 이르렀다. ‘겁없고 당돌했던’ 옛 시절 캠퍼스에서 첫 인연이 시작된 이래 인간을 존중하고 약자 대중의 시민권을 옹호하는 따뜻한 경제학, 경제학을 부의 연구일 뿐 아니라 더 크게 인간연구의 일부로 여긴 통합경제학의 정신에서 배우면서 차츰차츰 뮈르달과 마셜(비주류 ‘마셜B’)의 경제학 그리고 한국에 뿌리내리는 살림살이 경제학의 공부 길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선생은 전 생애에 걸쳐 성장제일주의와 씨름했다. 성장중독과 시장인간의 대척에 섬으로써 사람들이 균형잡힌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 학현의 기본 입장이었다. 학현은 숱한 위기로 점철된 성장성공의 구조적 불안정성, 성공에 가려진 다대한 사회적 비용, 재벌로 대표되는 소수가 함께 협력해 만든 공동 부의 최대 수혜자가 되고 다수 약자가 제 몫을 갖지 못하거나 희생당하는 부조리를 날을 세워 비판했다. 그러면서 담대하게 평등과 정의, 안정의 3대 가치를 전면에 내건 인간존중 대안발전의 길을 가리키며 비판적 노선을 밀고 나갔다.
그럼에도 선생이 비판일변도로만 일관했던 것은 아니다. 이는 의외로 들릴지 모른다. 왜냐하면 선생이 비판 또는 반대만 일삼았다는 식의 상투적 지적들이 있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학현경제학은 개발주의와 공유지점을 가지면서 갈라졌다. 적어도 국가의 역할, 재벌체제, 개방경제의 세 가지 문제에서 이를 보여준다. 선생은 경제개발계획의 수정론자로 불리기도 했는데 국가에 의한 계획적 조정이 필요하다고 보면서도 그 위험성 또한 잘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또한 선생은 재벌의 뛰어난 성장능력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 사회적 책임 수행의 저열함과 부끄러움을 모르는 천민성을 비판했다. 이뿐만 아니라 학현은 여느 경제적 민족주의자와 달리 수출증진과 개방경제의 이익을 적극 옹호했다. 그러면서 과도한 대외의존성이 가져오는 위험을 비판했다. 학현이 가리키는 바는 개방경제의 이익을 확보하면서도 내발적 분업을 제고해 국민경제 자율성을 높이고 민중계층에 성장성과가 균점되는 높은 길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한평생 경제민주화와 경제정의 실현을 위해 헌신한 선생은 성장이 인간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지 주객이 전도되어선 안 된다고 역설했다. 이뿐만 아니라 삶의 질 향상은 환경과 공존하는 가운데 이뤄져야 한다고 말하고 기후위기 대응이 시급함을 촉구했다. 여기서 우리는 학현경제학의 진수를 만난다. 불평등과 불의를 타파해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며 환경과 공존하는 사회생태적 대안경제의 길로 가자는 게 학현이 남긴 메시지다. 학현의 몸은 떠났지만 학현경제학의 영혼은 영원히 우리 곁에서 살아 숨쉴 것이다.

이병천 강원대 명예교수·지식인선언네트워크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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