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GO 발언대] 국회는 응답하라, 전세 피해자들 목소리에
수도권 지하철 동대문역사문화공원 4호선 플랫폼에는 페인트가 벗겨진 벽들이 있다. 회색 벽면이 어렴풋이 드러난 이곳은 지하철을 기다리던 이들이 등이나 어깨, 머리를 기댔을 법한 자리다. 이 피로의 흔적을 볼 때마다 나는 조금 울컥한 마음이 든다. 각자 버티고 있는 삶의 하중이 도시 어딘가엔 새겨져 있다.
가장 아픈 곳이 몸의 중심이라던데,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내 세계의 중심에는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들이 있었다. 가난이 재앙인 사회에서 아프지 않은 사건이 없지만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들이 잃은 것이 보증금이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나는 좀 더 이 문제가 슬프게 느껴진다. 세입자들에게 보증금은 통장에 찍혀 있는 숫자 몇 개가 아니라 삶이다. 스무 살부터 일을 쉬어본 적 없는 사람의 하루하루나 엄마가 남겨주신 마지막 목돈, 미래의 꿈을 향한 디딤돌 같은 것들이 보증금의 내용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한 해 동안 전세사기 문제 해결을 위해 앞장선 것은 누구보다 피해자들이었다. 전 재산을 잃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이 문제를 사회적인 것으로 만들고, 자신의 숙제로 감당하려 애쓴 이들의 원동력에는 나와 같은 처지의 이웃이 없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반면 정부는 줄곧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사인 간의 일’이라며 팔짱만 꼈다. 지난 5월 어렵게 전세사기 특별법을 제정했지만 6개월이 흐른 현재 전세사기·깡통전세 문제는 계속 확산 중이다. 특별법에 따른 피해자 인정은 9000명, LH(한국토지주택공사)가 피해 주택을 실제 매입한 사례는 0건이라는 점만 보더라도 특별법이 얼마나 소극적인지 알 수 있다.
그런 정부와 국회가 적극적으로 돕는 것은 누구인가? 얼마 전 국회 국토교통위원회는 재개발 초과이익 환수율을 줄이는 개정에 합의했다. 종합부동산세를 인하해 1조5000억원의 세액이 줄었고, 프로젝트파이낸싱(PF) 보증 규모를 15조원에서 25조원으로 확대한다. 상대적으로 부자거나 리스크 관리의 책임이 있는 기업의 실패에는 관대한 정부가 피해자들을 지원하지 않는 것은 방법이 없거나 모르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것’에 가깝다.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를 외면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함께 주조한 위기의 비용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는 일이다. 외환위기에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던 것처럼, 코로나19 시기 자영업자들이 소리 없이 문을 닫고 사라져야 했던 것처럼. 평범한 시민들의 삶을 지키는 데 무심한 정치가 시민들의 삶을 더욱 힘겹게 만들고 있다.
이번주도 전국의 피해자들은 특별법의 실효성 있는 개정을 요구하며 1인 시위와 집회를 이어간다. 국민의 절반인 세입자들이 겪는 위기를 자신의 위기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국회는 국민을 대표할 자격이 없다. 국회는 회기 내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반드시 응답하라.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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