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떴다방 정치’의 시대에
보일러의 에어(air)를 한바탕 뺐는데도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엊그제 아파트 관리실에 전화를 걸어 보일러를 제대로 때고 있는 것인지 확인하고 나서야 다행히 방바닥에 온기가 조금 돌기 시작했다. 몇 년 전부터 슬슬 재개발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아파트가 낡긴 했지만, 막상 재개발을 하면 어쩌나 하는 찬바람이 마음 한구석에 분다. 그것은 서울이나 서울 언저리에서 사는 게 일종의 난민 같다는 느낌을 아직 벗어버리지 못해서일 것이다. 그래서 재개발을 시작하면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하는 막막함이 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돌아보면 한자리에서 오래 살긴 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내게는 유목의 피가 부족해서인지 다른 곳으로 이사 갈 엄두가 잘 나지 않는다. 사실 이런 걱정도 ‘가진’ 자라서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여기서 내 말문은 막히고 만다.)
겨울이 두려워지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현상이다. 지금은 사계절이 명확한 때가 아니어서일까. 사람이란 본래 미래의 일에 얼마간 예측 내지는 준비가 필요한 존재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몸이 그동안 사계절의 순환에 익숙해졌을 수도 있다. 단순히 ‘나의 몸’의 문제만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기후변화를 구체적으로 느끼는 것은 ‘나의 몸’이고, 몸의 떨림에 따라 마음이 동요하고 있는 것도 ‘나의 사실’이다. 생각을 넓혀보면 우리가 사는 현실 자체가 오리무중이어서인지도 모른다. 내 주위에는 이런 예측하기 힘든 현실에 무너질 것만 같은 사람들이 적잖다.
떴다방 난립이 새 정치일 리 없다
내년 봄에 치러질 국회의원 총선거 때문인지 정치인들의 언행이 부쩍 긴박해졌다. 마치 거대한 소용돌이 앞에 선 듯한 언행들을 보면, 저이들이 지금 내 주위의 추운 사람들보다 불쌍해보이기까지 한다. 이른바 각자도생이라는 우리 사회의 각박한 마음을 정치인들이 솔선수범해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정치는 생물이라는 구태의연한 언어는, 대화와 타협 또는 시시각각 변하는 현실에 알맞은 실사구시의 정신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정치인 자신들의 이합집산을 은폐하는 질 낮은 수사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합집산을 노회한 정치 모리배들만 꾀하는 게 아니라, 이른바 ‘청년 담론’ 덕에 수월히 직업 정치인이 된 이들도 능하긴 마찬가지다. 거창한 이유로 (연합정치에 미치지도 못하는) 신당이니 선거연합이니 하는 것들을 보면 이렇게 가다가는 이번 국회의원 총선거는 그야말로 정치적 떴다방의 난립으로 어지러울 것이 명약관화하다.
낡아빠진 기성 정치인들이 그동안 보여준 벌건 욕망의 정치를 접어주자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떴다방의 난립이 새로운 정치일 리는 없다. 그것은 그냥 각자 자신들의 욕망을 정치에 투여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치 계급 내부 투쟁이 계속됐을 때 나타날 현상들이다. 사실 이미 어떤 현상의 결과가 저 떴다방 정치일지도 모르지만 한 나라의 운영에 직접 참여하는 정치인들이 염치도 없이 날것으로 보여주는 욕망을 보면, 우리나라 정치에는 아직도 빼야 할 에어가 아주 많은 것처럼 보인다. 즉 우리나라 정치에는 아직도 녹물이 한가득이라는 것이며 우울한 것은 새로 주입된 물도 너무 빨리 녹물이 됐다는 사실이다. 이 녹물들이 과연 우리의 방바닥을 얼마나 따뜻하게 해줄 것인가, 내게는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허송세월을 틈타 겨울은 점점 더 예측불허의 기후를 보일 것이다.(이게 겨울만일까!)
오늘날 민주주의는 기계적 분배와 권리의 평등으로 인해 질곡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여기엔 물론 몫과 권리의 독과점이라는 역사적 선행(先行)이 있지만, 그렇다고 꼭 그 반대가 선(善, 좋음)이라곤 말하기 힘들다. 정치적인 분배와 권리의 평등 개념에 경제적 욕망의 오염수가 스며들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혹 자신의 자본주의적 욕망을 은폐하면서 분배와 권리의 평등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모두 정치적으로 옳다. 들려오는 모든 정치 언어들은 옳다. 그런데 어째서 점점 삶은 힘들어지고 불안해지고 눈앞이 뿌연 것일까. 감히 이 자리에서 그 원인을 말할 자신은 없지만, 자신들의 민주주의가 최상이라 생각했던 아테네 시민들을 직격한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정치언어들 옳은데 삶 왜 힘들까
“가장 훌륭한 양반, 당신은 지혜와 힘에 있어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명성이 높은 국가인 아테네 사람이면서, 돈이 당신에게 최대한 많아지게 하는 일은, 그리고 명성과 명예는 돌보면서도 현명함과 진실은, 그리고 영혼이 최대한 훌륭해지게 하는 일은 돌보지도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게 수치스럽지 않습니까?”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도 선처를 구하기보다 ‘진실 말하기’를 멈추지 않아 독배를 받았고, 서슴없이 마셨다.
황규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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