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성남시 흡수해 메가서울로”…50년전에 벌써 제안 있었다는데 [사-연]

한주형 기자(moment@mk.co.kr) 입력 2023. 12. 3. 15:42 수정 2023. 12. 3.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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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울의 확장사를 따라 걷다 (3) [사-연]
1945년 9월 조선총독부 청사 앞 광장에서 한국에 진주한 미군들이 일장기를 끌어내리고 미국의 성조기를 게양하고 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해방 이후 수도의 지위 회복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과 함께 식민지였던 조선도 해방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곧이어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이 분열되었고, 남북한에서는 각각 미군과 소련군에 의한 군정이 시작됩니다. 미군정 실시와 동시에 경성부의 모든 행정은 미군에서 임명한 경성부윤에게 일임됩니다.

미군정 시기 서울의 변화는 ‘서울시의 지위 회복’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군정 1년 후인 1946년, 미군정은 서울시헌장을 발표하며 경성부를 서울시로 이름을 바꾸는 것과 함께 행정조직과 운영을 개편하였습니다. 이로서 서울시는 더 이상 경기도에 예속된 도시가 아닌, 도와 같은 수준의 지방자치단체가 되었습니다. 서울시에는 8개의 구(종로구·중구·동대문구·성동구·서대문구·마포구·용산구·영등포구)가 설치되었고 일본식 동정명은 한국식 동명으로 개정되었습니다. 경성부윤의 명칭도 서울시장으로 바뀌며 초대 시장이 취임했습니다.

1945년 해방직후 호주 정보군이 촬영한 서울의 모습. 서울역 광장에 모인 인파(왼쪽)과 시내를 달리는 노면전차(오른쪽)의 모습. [한국영상자료원]
1949년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부터 한국전쟁 전까지의 서울에 가장 큰 변화가 있던 해였습니다. 이를 설명하기에 앞서 1940년대 후반 서울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해방과 남북한 분열 과정에서 북에서 남하한 월남민과 해외에서 귀국한 동포, 농촌인구의 유입으로 서울 인구는 급속도로 증가했습니다. 1945년 광복 당시 90만이었던 서울 인구는 1949년 143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가시적인 변화는 불가능했지만, 서울시에서는 도시의 앞날을 위해 두 가지 조치가 시행되었습니다. 하나는 1949년 지방자치법의 제정입니다. 법령에 따라 서울시는 서울특별시로 승격되었고, 특별시에 걸맞은 조직과 기구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같은 해 대통령령 제159호(시·도의관할구역및구·군의명칭·위치·관할구역변경의건)의 시행입니다. 이 때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뚝도면, 은평면과 시흥군 동면 일부가 모두 서울로 편입되었습니다. 과거 한성부 성저십리 지역을 회복함과 동시에 1936년 경성부 확장 시 배제되었던 구로 일대가 포함된 것이었습니다. 서울시의 도시면적은 종전 133㎢에서 268㎢로 약 2배 늘어났습니다. 이 당시 편입된 고양군 숭인면 일대와 동대문구 일부 지역을 합해 성북구가 신설되었습니다.

1954년 6월 광예사에서 발행한 6.25 전쟁 직후 서울 모습과 한국 철로망을 표시한 지도. 서울 지도와 함께 서울 신도시계획과 동란파괴상, 중요기관소 정보가 인쇄되어 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강남북 시대의 시작
1964년 서울 시내에 난립한 판자촌. 용산구와 동대문구 일대 판자촌의 모습(위 사진). 아래는 중구와 용산구에서 철거가 진행되는 무허가 판자촌과 건물들. [서울역사아카이브]
시계태엽을 감아 1960년대로 나아가 보겠습니다. 이시기 서울은 전쟁 이후 폐허가 된 도심의 전재(戰災)복구사업이 진행되어 서서히 현대도시의 면모를 갖춰가고 있었습니다. 빠른 속도로 진행된 경제성장과 도시화에 너나 할 것 없이 서울로 상경해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이러한 배경 아래 서울 인구는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었고 이것은 수많은 도시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서울 인구는 매년 20만 명씩 늘어나고 있었지만, 당시의 도시계획이나 건설 재원으로는 이들이 거주할 수 있는 주택을 효율적으로 공급할 수 없었습니다. 도심지와 가까운 하천변이나 구릉지에는 무허가 판자촌이 난립했고 만원버스, 식수난, 공동화장실 등 인구 과밀이 원인이 되는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인구증가와 주택부족은 필연적으로 신규택지의 수요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서울 확장의 움직임이 조금씩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1962년, ‘서울특별시 행정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며 서울시는 국무총리 직속기구가 되었습니다. 시장의 지위도 장관급으로 격상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1963년 1월 유 없는 서울의 확장이 시행되었습니다. 양주군 구리면과 노해면이 동대문구와 성북구로, 김포군 양동면과 양서면, 시흥군 신동면과 동면, 부천군 소사읍 일부는 영등포구로, 광주군 구천면과 중대면, 언주면, 대왕면에 이르는 지역이 성동구로 편입됩니다. 서울 면적은 268㎢에서 593㎢로 다시 두 배나 넓어졌습니다. 이 확장으로 서울은 한강을 품에 안는 강남북 구조가 처음으로 가시화되었습니다.

서울시내 만원 버스의 모습을 스케치한 경향신문 1969년 9월 2일자 기사. [경향신문]
소설가 이호철은 <서울은 만원이다>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서울은 넓다. 아홉 개의 구에, 가·동이 대충 잡아서 삼백 팔십이나 된다. 동쪽으로는 청량리 너머로 망우리, 우이동, 동북쪽으로는 의정부를 바로 지척에 둔 수유리, 서쪽으로는 인천 가도 중간의 영등포 끝, 동남쪽으로는 한강 너머의 천호동 너머, 서남쪽으로 시흥까지. 이렇게 굉장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넓은 서울도 삼백 칠십만이 정작 살아보면 여간 좁은 곳이 아니다. 가는 곳마다, 이르는 곳마다 꽉꽉 차 있다. 집은 교외에 자꾸 늘어서지만 연년이 자꾸 모자란다.

위 내용을 보면 1963년의 확장 이후의 서울의 범위를 서술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울은 그야말로 ‘대확장’을 이루었지만, 주택이나 도로, 상하수도와 같은 기반시설의 부족은 즉각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확장한 서울의 모습을 보면, 확장지역 대부분이 한강 이남의 지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이유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1963년 이전부터 정부는 강북의 넘치는 인구를 신도심으로 분산할 대책을 고민하고 있었고, 이 개발지역으로 낙점된 곳이 한강 아래의 넓은 땅, 바로 영동이었습니다. 즉, 후에 개발될 영동지구를 서울의 테두리 안에 넣는 것을 고려한 확장이었던 것입니다. 이에 더해 1960년도 거듭되는 안보 이슈와 북과의 대치 상황은 확장하는 서울의 모양을 남쪽으로 쏠리게 하는데 영향을 주었습니다. 강북의 인구를 강남으로 분산해 전시상황에서 서울시민의 도강을 최소화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사-연 강남 개발 편에 쓰여 있습니다)

1972년 서울 영등포구와 동대문구 일대에서 진행된 새마을운동. 1969년 11월 농어촌근대화촉진법이 발표되었고, 1971년부터 새마을운동이 시행되기 시작한다. 1972년 서울시는 매월 1일을 새마을날로 결정하고, 새마을운동의 생활화와 도시새마을운동의 도약 등을 시정목표로 잡기도 했다. 당시 새마을 운동의 주요사업은 가정집 슬레이트 지붕 고치기 및 서양식 현대화 주택 건설, 도시 및 도로 미화 사업, 새마을 지도자 양성 및 교육 등이었다. [서울기록원]
서울의 팽창 저지선, 개발제한구역
1973년 서울 인창서관에서 발행한 서울 지도. 서울시의 행정구역 등이 간략하게 표시되어 있고, 그린벨트를 푸른색으로 채색하였다. [국립민속박물관]
1963년 서울은 두 배나 넓어졌지만, 이와 동시에 추가적인 확장이 고려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당시 건설부는 경기도의 일부 지역을 서울시 도시계획구역으로 지정합니다. 시흥군 서면(현 광명시)와 과천면, 고양군 신도면, 부천군 오정면이 이에 해당했습니다. 1970년 양택식 서울시장은 이 지역에 시흥군 안양읍(현 안양시)과 광주군 서부·중부·대왕면(현 성남·하남·광주시 일부), 고양군 원당읍과 지도면 등을 더해 서울을 확장할 것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합니다. 이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만약 성사되었다면 한강 이남의 서울 면적이 대폭 확장되어 총 996㎢의 면적의 거대 서울이 탄생했을 것입니다. 위 지역들은 1980년대를 거치며 차례로 지정 해제되어 독자적인 시로 승격됩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맏딸 근혜 양과 함께 1977년 4월 경기 의왕시 일대에서 식목일 기념식수를 하고 있다. [산림청]
무한히 확대될 것 같은 서울의 팽창에 제동이 걸린 것은 ‘그린벨트’로 불리는 개발제한구역의 등장이었습니다. 도시의 무분별한 확장을 막고 농지와 녹지면적의 보존을 위해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은 그린벨트를 확정 고시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듬해 서울시는 도시계획법에 ‘개발제한구역의 지정’ 조항을 마련한 후 서울과 경기도의 접경지 454㎢ 넓이에 개발제한구역을 설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에는 조항 설립 목적에 위배되는 어떠한 개발행위도 할 수 없도록 못을 박았습니다.

1973년 고양군 신도면 구파발리, 진관리 일대가 서대문구로 편입된 것과 1995년과 2015년 경기권 신도시 건설에 따라 소규모의 경계 조정이 있었던 점을 제외하면, 1963년의 서울 대 확장 이래 60여 년 동안 서울 지도는 지금까지 큰 틀의 변화 없이 유지되어 왔습니다.

1976년 1월 열린 강남구청사 준공식(왼쪽). 가운데는 1978년 9월 구 승격 1주년을 기념하여 강서구 일대에서 열린 구 승격 1주년 기념행사. 오른쪽은 1988년 5월 열린 양천구청 개청식. [서울역사아카이브]
대신 자치구의 분화는 활발하게 있었습니다. 1973년 영등포구에서 관악구를, 성북구에서 도봉구를 분구했습니다. 1970년대 성동구의 면적이 전체 서울시 면적에 약 30%에 달하고 강남 개발로 인구가 100만 명 이상으로 증가하자, 1975년 성동구 면적을 줄이고 강남구를 신설합니다. 이후 1977년 강서구, 1979년 은평구와 강동구, 1980년 구로구와 동작구, 1988년 중랑·노원·양천·서초·송파, 1955년 광진·강북·금천구가 생기며 서울 25개 자치구가 완성되었습니다. 특정 지역이나 구가 비대해지면 행정구역을 쪼개 인구와 규모를 적정 수준으로 조정해 구민들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행정업무의 능률을 올릴 수 있도록 분화해 온 것입니다.
서울 행정구역 변천 과정.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위성사진으로 살펴보는 서울 시가지 형태의 변화. [서울도시계획포털]
인구 약 941만 명(2023년 8월 기준), 면적 605㎢, 총 25개 자치구로 구성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 100년여 시간 동안 급성장한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1910년의 경성과 비교해보면 서울은 확장을 거듭하며 약 37배 넓어졌고, 인구는 50배 증가했습니다. 주변 위성도시를 흡수하며 ‘메가 서울’로 거듭날지 아니면 지금의 모습을 유지할지, 서울의 미래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판단은 유보한 채 사-연 서울 확장 편을 마무리합니다.

<참고자료>

ㅇ 서울역사박물관 상설전시

ㅇ 김기호 외 6인, 서울도시계획사 제2권 「광복~1970년대의 도시계획」, 서울역사편찬원

ㅇ 「시민을 위한 서울역사 2000년」,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정부기록물과 박물관 소장 자료, 신문사 데이터베이스에 잠들어 있는 빛바랜 사진들을 열어 봅니다. ‘사-연’은 그중에서도 ‘길’, ‘거리’가 담긴 사진을 중심으로 그곳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연재입니다. 거리의 풍경, 늘어선 건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 등을 같은 장소 현재의 사진과 이어 붙여 비교해볼 생각입니다. 사라진 것들, 새롭게 변한 것들과 오래도록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과거의 기록에 지금의 기록을 덧붙여 독자님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해당 장소에 얽힌 ‘사연’들을 댓글로 자유롭게 작성해 주세요. 아래 기자페이지의 ‘+구독’을 누르시면 연재를 놓치지 않고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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