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희와 미소지니’부터 ‘트렌스젠더 적대’, ‘넥슨 여혐’까지···정희진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책에서 건진 문단]

김종목 기자 입력 2023. 12. 3. 14:09 수정 2023. 12. 3.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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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건진 문단’(책건문)은 경향신문 책 면 ‘책과 삶’ 머리기사의 확장판 이름입니다. 지면 서평은 ‘지면 제약’ 때문에 한두 문장만 인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책건문’은 문단 단위로 내용을 소개합니다. 지면 서평도 더 쉽게 자세하게 풀었습니다. 지은이 뜻을 더 정확하게 전하려는 취지의 보도물입니다. 경향신문 칸업 콘텐츠입니다. 책 문단을 통째로 읽고 싶으시면 로그인 해주세요!

☞ [책에서 건진 문단]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는 삶 앞에서
     https://m.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311250600001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의 새 책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교양인) 제목은 2005년 낸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따온 겁니다. 다시 도전하려는, 즉 맞서 싸우려는 대상은 ‘일부 여성주의자’ ‘여성주의 진영 일각’도 포함하죠. 정희진은 “이제는 남성 문화뿐만 아니라 동료, 여성주의자. 여성들과 내 의견이 다른 경우가 많아졌다”고 말합니다.

다른 의견 중 하나가 ‘피해자 중심주의’입니다.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정희진은 성범죄에 대한 인식이나 수사 기관의 태도 문제를 먼저 지적합니다.

성범죄가 범죄라고 알려야 하는 현실과 ‘피해자 중심주의’

“사기나 절도 범죄에는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당연하기 때문이다. 어느 범죄나 신고가 접수되면 피해자 말부터 듣는 게 상식”이죠. 성범죄도 “다른 범죄처럼 범죄의 심각성과 상황, 죄질에 의해 판단”하면 되는 겁니다.

현실에선 이 상식이 통하지 않죠. 검찰과 경찰은 피해자에게 피해 증명을 떠맡깁니다. 피해자나 여성단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되어 버립니다. “여성이 당하는 폭력은 사회적 인식이 매우 낮기 때문에 그 행위가 범죄라는 사실을 알려야” 하는 상황에서 등장한 구호가 피해자 중심주의라고 정희진은 말합니다.

정희진은 “(피해자 중심주의가) 범죄를 범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가해자와 사회를 설득하는 것이지, 피해자의 말이 무조건 객관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피해자 중심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오히려 성폭력 사건의 객관성 증명 책임을 피해 여성에게 지운다는 사실”입니다.

범인의 성별이 압도적으로 남성이 다수라는 사실 외에는 성폭력도 다른 범죄처럼 사건마다 성격이 다르다. 진상 규명은 피해 여성의 말을 무조건 옹호한다고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평소 사회가 성폭력의 잠재적 피해자인 여성들의 목소리를 얼마나 존중해왔는가에 달려 있다
나의 경험이 “피해였다”라는 자각과 ‘피해 의식’은 다르다. 피해는 상황이지 정체성이 아니다. 피해자 정체성은 더 위험하다. 피해자라는 위치가 곧 피해의 근거가 된다는 사고방식으로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다. 왜 여성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women)이 이토록 만연한가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구체적 정책이 필요할 뿐이다. 집단적 억압이든 개인적 사건이든 가해자는 자신을 해방할 수 없고 피해자는 성장하기 어렵다(나부터 그렇다). 남성 중심적 사회가 만든 피해와 가해의 ‘이분법’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는 식민주의적 사고다.

정희진은 ‘피해(자)’ 문제를 두고 1980년대 민중가요 ‘딸들아 일어나라’의 문제와 지금 현실 문제를 연결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땅의 노동자 역사의 주인인 노동자 더 이상 벼랑 끝에 흔들릴 수는 없다/ 딸들아 일어나라 깨어라”라는 가사로 이뤄진 노래입니다. “‘여성’이 아니라 ‘딸’이라는 성 역할 지칭은 계몽의 주체로서 남성 어른의 시각을 반영”한다. 이 노래는 성차별의 원인을 ‘여성의 각성 부족’으로 봅니다. 정희진은 “남성에 비해 여성의 ‘지나친’ 각성이 ‘문제’인 시대”라고 했습니다. “누가 ‘원인’ 제공자인가? 여성, 장애인, 노인, 건강 약자에 대한 모욕과 차별이 그들의 대응 부재 때문인가, 아니면 사회 구조 때문인가? 쉬운 비유를 들면 지금의 환경 파괴는 지구의 잘못인가? 그래서 지구가 변해야 하는가?” 정희진은 “피해자가 해결사로 나서라는 메시지의 목표는 차별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한다”고도 했습니다.

2005년 세계여성의날인 3월 8일 서울 세종로 소공원에서 열린 여성 투쟁사업장 현안 해결 및 비정규직화 저지 결의대회에 참가한 한 여성노동자가 ‘성차별, 불법파견’ 등이 적힌 모형벽을 들고 창살 틈으로 바라보고 있다. 서성일 기자
“성적 자기 결정권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니다”

또 다른 의견 하나는 ‘성적 자기 결정권’입니다. 정희진은 이 결정권이 “자유주의 이전의 언설, 즉 여성의 몸은 가족, 남편, 국가의 소유물이라는 의미(정조, 貞操)에 반대하는 개념이지 그 자체가 추구해야 할 목표는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전통적인 페미니즘 이론, 특히 서구 급진주의 페미니즘 사상과 그간 한국의 반(反) 성폭력 여성 운동은 성폭력이 정조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는 문제라고 주장해 왔다. 성적 자기 결정권 담론은 순결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여성의 성이 여성에게 속해 있다고 주장하면서, 위에 언급한 것처럼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특별법 제정 운동의 핵심적인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또한 성적 자기 결정권은 여성뿐 아니라 동성애자, 장애인을 비롯해 성적 피억압자, 성의 자유를 박탈당한 사회적 약자에게 보편적 권리로서 인권을 보장할 수 있는 소중한 개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개념의 논리는 몸/정신의 이분법과 초월적 개인(individuals)의 개념을 전제하는 자유주의 철학에 기반한다. 여성도 남성처럼 몸이 아니라 정신의 담지자라고 보며, 여성도 남성처럼 개인의 위치로 승격해 달라고 요구한다.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 이론은 현실적으로 매우 유용하고 강력한 성폭력 반대 논리로 기능해 왔지만. 개인의 동의와 선택, 자유 담론에 기반하기에 성폭력이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성별 제도라는 사회 구조에서 발생하는 범죄라는 여성주의의 주장과 모순된다.
#성적 자기 결정권…개인과 구조 문제는

성적 자기 결정권 문제는 복잡하죠. “성적 자기 결정권은 성폭력처럼 성적 자기 결정을 침해하는 사안에 대해서도 주장할 수 있지만 성매매, 다이어트, 외모 관리, 여아 낙태처럼 여성이 자신의 의지로 (대개 남성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몸을 자원, 투자, ‘처벌’, ‘학대’의 대상으로 삼을 권리로도 주장할 수 있게 된다.” 정희진은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 이론은 현실적으로 매우 유용하고 강력한 성폭력 반대 논리로 기능해왔지만 개인의 동의와 선택, 자유 담론에 기반하기에 성폭력이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성별 제도라는 사회 구조에서 발생하는 범죄라는 여성주의의 주장과 모순된다”고도 말합니다.

성적 자기 결정권이 “여성들 중에서도 근대적 남성 주체와 같음을 주장할 수 있는 비장애 성인 여성을 기준으로 한 논리이기에 장애 여성이나 어린이, 노인, 환자에게는 적용하기 어렵다”고도 했죠.

성적 자기 결정권은 ‘여성 공간(화)’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벨기에를 강간했다” 같은 남성의 소유물, 거래 대상, 약탈물로 간주하는 표현 못지않게 여성을 공간화한 표현도 많죠. 예를 들어 원시림을 ‘처녀림’, ‘처녀지’ 불렀습니다. 정희진은 “정복과 개발의 대상이 되는 공간은 여성화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한국여성‘개발’원이나 여성‘발전’기본법도 “남성 주체의 시각에서 볼 때 여성은 개발(develop, exploit, enlighten, open up)되어야 할 대상”으로 봤기 때문에 나온 이름으로 봅니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공간으로 여겨집니다. 동서양에 비슷한 사례들이 나옵니다.

처녀림? 여성을 공간으로 칭하는 말들이 뜻하거나 은폐하는 것들
여성의 몸이 남성에 의해 명명되어 왔기에 여성의 신체 기관에는 대부분 공간 명칭이 있다. 남아가 사는 곳인 ‘자궁(子宮)’, 여성의 질을 뜻하는 버자이너(vagina)는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칼이 머문다는 의미에서 ‘칼집’이라는 뜻이다. 질(睦)의 한자 역시 방(室)이라는 글자를 포함하고 있다. 중세 영주가 농노의 아내에 대해 초야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논리 중의 하나인, 여성의 질이 남성의 성기를 잘라 삼켜버린다는(vagina dentata) 삽입 섹스의 공포도 여성의 질에 대한 공간화에서 비롯되었다. 성교를 의미하는 ‘삽입(intercourse)’이라는 말 역시 여성을 ‘들어가는’ 영토로 전제하는 논리다. 아내를 일컫는 ‘집’사람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여성 비하적 언어로 논쟁의 대상이 되곤 하는 ‘아줌마’라는 말은 여성을 ‘아기 주머니’로 보았기 때문에 생긴 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아줌마가 ‘아기 주머니’, ‘아주머니’를 거쳐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정희진은 공간(화) 문제를 전시나 일상 성폭력과도 이어내 설명합니다. ‘피해자 중심주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정희진은 “피해자는 투쟁으로 ‘획득되는 지위’”라고 봅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피해자의 저항은 평생에 걸친 과정일 수도 있고, 생전에 해결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가해자가 피해자라고 나서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제주 4·3 사건도 그랬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도 그랬다. 일상적으로는 여성이 겪는 성폭력이 대표적”이라고 말합니다.

공간(화) 문제를 두곤 “여성의 몸을 공간화하는 인식은 성폭력 발생과 은폐의 논리”가 들어간다고 봅니다.

‘여성은 밭이기 때문에’ 전쟁에서 피점령지 여성에 대한 집단 강간과 강제 임신은 ‘인종 정화(제노사이드)’로 합리화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남성 공동체의 재생산을 위한 최후의 재산이다. 여성의 몸은 여성의 것이 아니라 남성 공동체의 소유물이 될 때, 집단 강간은 남성들 간의 소유권 분쟁, 재산 탈취 행위로 간주된다. 어떤 남성과 섹스하느냐, 누구에게 성폭력당하느냐(“어떤 씨가 뿌려졌느냐”)에 따라 여성의 정체성이 달라진다고 보기 때문에 여성의 몸은 전쟁에서 ‘전리품’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탈사회화, 탈육체화(disembodied)된 공간 개념은 국가 간, 인종 간. 성별 간 전쟁의 인식론적 토대를 제공해 왔다. 탈취 대상으로서 공간이 성별화될 때 집단 간 전쟁은 피점령지 여성에 대한 집단 강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성폭력 역시 마찬가지다. 성폭력이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이 아니라, 피해 여성이 속하거나 피해 여성을 소유한 남성에 대한 폭력으로 환원되는 것도 여성 몸을 남성의 영토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성폭력의 발생 원인이자 성폭력이 해결되지 않는 이유, 그리고 성폭력을 가시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이 문제가 남성과 남성 사이의 정치로 환원된다는 점에 있다. 이는 남성은 정치적 주체로 전제하고 여성은 남성 집단간 정치의 희생자로 전제하여, 남성과 남성의 갈등은 정치적 문제로, 남성과 여성의 갈등은 개인적인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넥슨의 여성혐오 어게인? 2016년과 2023년 벌어진 일들

피해 여성을 두고 남성들이 두고 벌이는 대결도 지적합니다. 정희진은 책 여러 곳에서 이른바 ‘진보 인사’의 성범죄를 다룹니다. 최근 넥슨 ‘메이플스토리’ 여성 캐릭터 엔젤릭버스터(엔버)의 ‘집게손가락’ 모양을 두고 벌어진 논란은 기시감이 들죠. 2016년 넥슨은 여성주의 티셔츠를 산 직원을 해고했죠.

‘범죄의 경중과 죄질이 아니라 피해 여성을’소유한, 남성들 간의 진영 논리로 사안의 중대성이 결정된다면. 이에 따라 피해 여성의 이해가 좌우된다면 미투는 남성 정치의 또 다른 연속일 뿐이다. 우리 사회의 ‘진보 시민’들이 좋아하는 인물이 가해자일 경우 싸움은 너무나 어렵다. 매체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 주간지 <한겨레21>은 “WANTED, 당신들의 세계를 부술 것이다, #미투, 3월 혁명”이라는 ‘거창한’ 제목의 표지에 대표적인 가해자들의 사진을 실었는데, 그들 중에 한 ‘진보 인사’가 있었고, 빗발치는 독자들의 항의로 온라인 기사에서는 그의 사진이 빠졌다. ……
2016년 게임 업체 넥슨의 여성 성우가 ‘여성주의 티셔츠’(이런 티셔츠도 있나?)를 구입했다는 이유로 해고된 사건에서, 당시 정의당 지도부는 우왕좌왕 입장을 번복했다. 내가 알기로 정의당은 노동자를 위한 ‘정의로운 정당’이다. 게임 업체의 소비자들은 이미 해고된 여성 성우를 맹비난했다. 정의당은 당연히 노동자를 지지하고 기업을 비판해야 했다. 그러나 노동자가 여성이고, 소비자가 남성일 때는 상식적인 판단력이 마비된다. 한국 진보 진영은 계급 의식보다 성차별 의식이 훨씬 ‘뛰어나다’. 다른 말로 하면, ’남성은 계급, 여성은 젠더’라는 식으로 생각한다. 여성은 노동자가 아닌가? 남성은 젠더를 초월한 인간의 대표인가? 한국 진보 진영의 젠더 의식은 군대보다도 못하다.

☞ ‘집게 손가락’ 향한 빗나간 손가락질…넥슨은 못 이긴 척 ‘여혐’ 거들었다
     https://m.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312010600005


☞ ‘페미’ 낙인찍어 직원 퇴출 요구하는 유저, 받아들이는 ‘게임 회사’ [플랫]
     https://www.khan.co.kr/national/labor/article/202309191043001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내 몸은 바로 나’다”

‘성적 자기 결정권의 정치학’이 대변하는 “내 몸은 나의 것”이라는 구호와 공간(화)의 문제도 들여다봅니다.

(이 구호로 대변될 때) 내 몸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인 내 마음의 결정에 따른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내 몸이 바로 나”다. 내 몸이 나의 것일 때 나의 몸은 나(의식)의 소유나 판단 대상에 불과하게 된다. 성적 자기 결정권은 남성의 여성 몸에 대한 공간화를 비판하는 논리지만, 여전히 몸과 마음의 이항 대립에 근거하여 여성의 몸을 여성 자신의 공간으로 삼는 논리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성폭력이 사적인 피해라는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했지만. 몸을 주체의 소유물이자 주체의 재산으로 간주하는 근대 자유주의 철학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때 개인의 몸은 행위 주체가 자신에게 부과한 의식에 종속된 ‘도구’에 불과하다. 몸은 정신의 매개일 뿐 그 자체로는 어떤 행위성과 생산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적 자기 결정권은 몸을 행위자라기보다는 여성이 소유한 공간으로 파악한다. 몸을 주체의 소유물로 보면 몸은 마음이 아닌 어떤 것이며 영혼, 이성, 마음의 배반이자 감옥이다. 즉 몸은 존재를 담아 두는 보관 장소에 불과하게 된다. 근대적 의미의 페미니즘 역시 사회, 정치, 문화 전반에 걸쳐 남성이 가정한 몸과 정신의 이분법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온 것이다.
“몸을 빼앗겼다”와 “몸을 되찾아야 한다”

‘남성 중심적 여론 매체’는 성폭력을 두고 흔히 “여성이 남성에게 ‘몸을 빼앗겼다”라고 쓰곤 합니다. 이는 “여성의 몸을 인간 주체와 분리된 물건object)으로 보는 것”입니다. 정희진은 페미니스트가 사용하는 공간(화)의 언어 문제도 지적합니다.

가부장제를 여성의 몸을 전유하고 통제하려는 남성의 권리 체계로 이해하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이 자신의 “몸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전쟁터이며, 여성이 재탈환해야 할 어떤 공간이라는 것이다. 남성의 재산인 여성의 몸을 여성이 다시 소유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몸이 남성에 의해서든(순결 이데올로기) 여성 자신에 의해서든(성적 자기 결정권) 주체의 대상으로서 공간이 되면, 몸은 언제나 이성의 지배를 받는 수동적인 것이 된다. 이러한 논리에서 여전히 몸은 이성, 의식 중심주의에 종속되고 몸들인 여성 개인들의 저항은 의미화되기 어렵다. 성적 자기 결정권을 넘어, 몸을 식민화하지 않는 성폭력에 대한 새로운 저항 개념 모색이 필요하다.

‘여성의 몸’을 두고 국가와 민족 문제도 비판합니다. 예를 들어 “강간범죄가 남녀 간의 성별 권력관계가 아니라 국가 간 민족 간 문제로 인식되면서 여성의 몸은 남성들 간의 전쟁터”가 됩니다.

“여성의 몸은 남성들 간의 전쟁터가 된다”
여성의 몸이 남성 집단 간의 전장(戰場)이 되면 여성은 기존의 좌/우, 진보/보수라는 정치적 구분에 상관없이 양쪽 모두에게서 성폭력을 당하게 된다. 1948년부터 6년간 지속된 제주 4·3 사건에서 여성들은 우익 테러 조직인 서북청년단과 좌파인 ‘산사람’ 두 집단 모두에게 성폭력을 당했고, 1980년부터 12년간 이어진 페루 내전에서 여성들은 정부군과 ‘빛나는 길(Sendero Luminoso)’이라는 이름의 페루 공산당 모두로부터 강간당하고 살해되었다. 여성의 몸이 공동체 ‘문화의 그릇’으로 간주되면. 종족의 단일성과 종족 지배와 종족 간 합병과 팽창은 모두 여성의 몸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영토뿐 아니라 남성이 상징하고 구현하는 문화를 식민지로 만드는 과정은 젠더적 행위로서 여성의 몸을 매개하여 진행된다. 그리하여 다른 나라에 대한 영토 침략과 정복은 곧 자궁 점령(occupation of the womb)을 의미하게 된다.

대다수 한국 남성들이 일제강점기 ‘군 위안부’ 경험을 “우리 여성들을 육체적으로 파괴함으로써, 겨레 전체를 정신적으로 파괴한 민족의 수치”라고 보는 것은 민족이라는 범주 자체가 여성의 몸에 기반하여 형성됨을 보여준다며 이렇게 썼습니다.

전시 성폭력을 여성 인권 침해가 아니라 여성의 생식 능력 훼손으로 보고 이를 민족 말살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때 여성의 몸은 남성 집단 간 갈등을 의미하는 ‘정치’에서 가장 확실한 동원의 토대로 쓰인다. 강간은 피해 여성뿐 아니라 피해 여성의 남편, 오빠, 아버지, 아들 등 남성에게 굴욕감을 준다. 남성 문화에서 강간은 자신의 여자를 보호하지 못한 남성의 무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자기 재산’을 보호하지 못했기 때문에 수치스러워한다. 강간당한 여성은 남성 공동체를 수치심과 굴욕감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피해를 숨기고 침묵해야 한다. 성폭력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영혼, 혈통, 명예를 상실한 남성들의 패배가 공식화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모든 공격과 폭력을 숨기는 것은 남성 공동체의 재산 통제 방식을 보여준다. 여성의 ’순결’이 남성의 명예이며, 이는 곧 국가의 명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성에게는 조국이 없다.” 근대 초기에 등장한 대표적인 페미니즘 슬로건이죠. 정희진은 “‘여성’과 ‘국가’, 둘 중 하나의 정체성만으로는 여성의 현실을 해석할 수 없다. 여성은 젠더와 민족 모두로부터 억압받기 때문이다. 정체성을 넘는 횡단의 정치가 필요한 이유”라며 일본군 위안부 관련 운동에 한국과 일본 여성들이 함께했고, 남성 국가의 프레임에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은 적국이지만 두 나라 여성들은 평화 연대에 성공한 점을 거론합니다.

‘책건문’에서 다룬 <애국의 계보학>(조고은 옮김, 나무연필)도 ‘여성의 몸’과 ‘표상’의 문제를 다룹니다.


☞ [책에서 건진 문단]박정희-김대중 ‘남성성’과 운동권의 ‘로맨스·조국통일’····야거 ‘애국의 계보학’
     https://m.khan.co.kr/culture/book/article/202311110600001

“‘김건희 비판’은 미소지니인가”

정희진은 ‘여성성과 자원’ 문제에서도 이견을 드러냅니다. “여성성은 기존에는 차별과 억압의 ‘원인’이었지만, 지금 일부 여성에게는 자원으로 작동한다”고 말합니다. 남성의 자원은 “돈, 지식, 지위 등 사회적인 것”이고, 여성의 자원은 “외모와 성, 성 역할 행동(애교, ‘여우짓’, 성애화된 행동)이라고 설명합니다.

정희진은 이 여성성과 자원 문제를 두고 “‘김건희 비판’은 미소지니인가”라는 제목의 글도 책에 실었습니다. 2022년 2월 23일 자에 실은 경향신문 칼럼 ‘정희진의 낯선 사이: 이재명·윤석열 후보의 같음과 다름’을 확장한 글입니다. 당시 이 칼럼 중 김건희 비판 대목은 논쟁이 일기도 했습니다. 이번 새 책에서도 문제의식은 같습니다. 정희진은 먼저 2022년 11월 김건희가 캄보디아 방문 중 선천성 심장질환을 앓는 아이와 함께 사진을 찍은 일을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타인이나 집단 전체를 이용하는 행위는 가장 뿌리 깊은 폭력”이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자원’과 ‘미소지니’에 관한 서술이 나옵니다. 정희진은 김건희를 두고 “경제력을 기반으로 해서 가부장제가 원하는 규범적 여성성을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자원을 확보해왔다”고 말합니다. 그는 “가장 절망스러운 현실은 당대 여성주의 세력 중 일부가 여성적 자원을 이용하여 범죄 혐의자를 넘어 대통령의 배우자까지 된 여성을, 사법 정의 차원에서 문제 제기하는 것을 미소지니라고 비판하는 일”이라고도 했습니다.

정희진이 보기에 미소지니(여성혐오)의 논리는 “여자는 모두, 그저 여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여성을 어머니와 창녀로 이분화하고, 스펙트럼 안에서 평가하는 방식을 예로 듭니다. 미소지니는 “상대를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마음대로 규정하는 사고방식”이자 “한 인간을 동일한 성격을 지닌 집단성으로 조작하는 행위”이고, “여성에 국한되지 않는 사회적 약자 전반을 지배하는 전략”이라고 설명합니다. “김건희 부부는 검찰 제도의 산물이고 김건희는 윤석열 정권을 탄생시킨 주역”이라는 비판 등은 미소지니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말이죠.

“성형 수술을 한 여성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여성의 과거를 문제 삼으면 안 된다, 유산 경험을 들춰서는 안 된다.” 모두 맞는 말이다. 섹슈얼리티를 문제 삼는 것은 당연히 미소지니다. 그러나 성차별 사회의 작동 원리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여성에게 성(性)은 억압이자 자원이다. 돈과 실력 있는 의사를 확보해야만 가능한 성형 시술이 피해인가. 공식 석상에서 기자를 ‘오빠’라고 부르는 ‘여성스러운 태도’도 비판해서는 안 되는가.
미소지니는 대통령조차 ’여성’으로 ‘격하’시킬 수 있는 남성 문화를 말한다. 미소지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실정(失政)을 벗은 몸으로 공격한 경우이다. 당시 나는 박 전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그의 공적 영역의 지위가 성 역할로서 여성으로 환원되는 문화 현상에 반대했다. 반면 김건희 여사는 경제력을 기반으로 해서 가부장제가 원하는 규범적 여성성을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자원을 확보해 왔다.
최강욱의 ‘암컷’ 발언은 “여성 한 명의 행위를 일반화한 미소지니”

이 대목은 논쟁적일 수 있습니다. ‘여성성과 자원’은 정희진이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인 듯합니다. 책 자기 소개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안목 있는 독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 군 ‘위안부’ 문제를 계속 공부하는 연구자, 남성성과 여성성이 모두 자원으로 작동하지 않는 사회를 희망하는 사람이고 싶다.”

이 장을 읽으면서 최강욱의 ‘암컷’ 발언에 관한 생각도 궁금해 물어봤습니다. 정희진은 “김건희씨는 형법적으로, 윤리적으로, 학문(?)적으로 범죄 혐의를 받은 사람입니다”라며 이렇게 답했습니다.

“최강욱 전 의원의 발언은, 여성 한 명의 행위를 일반화시킨 행동입니다. 흑인 한 명이 범죄 행위를 저질렀다고, 그들 전체를 ‘니그로’라고 하지는 않잖아요? 즉 한편으로는 모든 여성을 집단적으로 동질화 하고, 한편으로는 여성이 범죄를 저질러도 ‘옹호’하는 것은 같은 미소지니입니다. 전자는 여성들 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미소지니, 후자는 모든 여성을 피해자, 약자, 금치산자로 보는 미소지니지요.”

최근 최강욱의 ‘암컷’ 발언을 두고 ‘오늘의 문장’을 썼습니다. 책 문장을 주로 소개하는 꼭지입니다. 이 발언이 시몬 드 보부아르가 <제2의 성>에서 비판한 글과도 이어진다는 취지의 기사인데, 최강욱 발언 옹호로 여기는 분들이 나와 제 글쓰기 문제를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 “남자는 모든 암컷의 교활함, 어리석음, 음탕함의 속성을 여자 안에 한꺼번에 투사한다”···최강욱 ‘암컷’ 발언의 기원[토요일의 문장]
     https://m.khan.co.kr/politics/politics-general/article/202311221514001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면, 정희진이 거듭 강조하는 건 ‘결정하는 권력’에 관한 문제입니다. “여성주의는 누가 남성이고 누가 여성인가를 정하는 권력의 소재를 밝히는 사회 정의에 관한 인식이지, 남성과 여성의 정체성 다툼에서 여성의 피해를 강조하는 사유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가부장제 사회도 “남성이 여성의 가치를 정하는 사회”죠.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은 자신의 이해에 따라 ‘보호해야 할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을 분리할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고, 이를 통해 여성을 통제한다.”

이런 ‘결정’을 남성만 하는 건 아닙니다. 정희진은 터프 등 여성주의 일각의 트랜스젠더 적대·혐오 사태 등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트렌스젠더 혐오는 “여성이 남성 대신해 누가 여성인지를 정하겠다는 발상”에서 나왔다
누가 여성인가. 그리고 그 기준은 누가 정한 것인가. 해부학?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구호는 생물학‘적’ 이유로 차별당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생물학조차 과학적이지 않다. 양성이 있다고 믿는 사회에서는 생물학적 본질주의와 생물학을 혼동한다. 실제로 이 둘은 정반대다. 생물학은 환경과 문화와 생명체의 상호 작용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지, 본질을 캐는 학문이 아니다. 아니, 생물학뿐만이 아니다. 본질을 추구한다면 이미 그것은 학문이 아니라 ‘신앙이다’.
모든 이들은 ‘사람’으로 태어날 뿐인데, 가부장제 사회에서만 인간을 ‘남녀’로 구별한다. 이는 차이가 차별을 낳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어야 차별의 근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차이는 인정하되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흔한 표현은 차이를 원래 있는 것처럼 본질화하고 고정화하는 사고방식이다. 무엇이 의미 있는 차이인지, 아닌지를 정하는 것은 사회적 맥락이다. 여성도 남성도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남성과 여성으로 표시되는 것뿐이다. 성별은 없다. 억압받는, 그리고 억압하는 성별이 있을 뿐이다. 여성은 실체도, 실재도 아닌 지배 규범(‘성 역할 사회화’)의 산물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특정한 여성만 여성으로 간주된다. 나이, 인종, 계급. 외모, 직업 등에 따라 여성의 개념은 유동적이다.

정희진은 “이제까지 현모양처. ‘예쁜 여성’ 같은 여성의 기준은 남성 문화가 정했다. 트랜스젠더 여성에 대한 혐오 사태는 여성이 남성을 대신해서 누가 여성인지를 정하겠다는 발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성기는 작은 차이다. 작은 다름을 본질로 만드는 그것이 바로 권력”이라고도 말합니다.

트랜스젠더 여성은 여성이 아니다? 그들이 여성의 권리를 빼앗아 간다? 여성 우선 페미니즘? 누구도 타인의 성별을 규정할 수 없다. 이제까지 여성 운동은 민족/민중/시민 개념을 독점하면서 인권의 위계에 따른 순서(“여성 문제는 나중에”)를 주장해온 남성 중심의 사회 운동에 저항해왔다. 여성주의가 진짜 여성과 가짜 여성을 구별하고 배제에 앞장선다면, 그런 여성주의가 왜 필요할까.

책은 여러 한국 현실 문제를 진단합니다. 성차별이 젠더 대결로 둔갑한 문제도 그중 하나입니다.

20대 남성과 ‘성공한 50대 남성’의 자녀 간의 계급 문제
20대의 젠더는 다른 연령대에 비해 불안정하다. 국가가 남성들을 징병제로 차출하는 동안 일부 극소수 여성들은 ‘차별 없는’ 시험 제도를 통해 사회에 진출한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일시적이고 일부 여성들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여전히 여성들은 남성 임금의 60퍼센트를 받고, 경력 단절의 위협과 위험 속에 공사 영역에서 이중 노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20대 일부 남녀의 삶이 전체 남성과 여성을 대변하는 듯 여겨지면서 착시 현상이 발생한 데다, 더욱 우려되는 점은 성평등에 대한 남성과 여성의 인식 차이가 두드러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진로를 고민하는 20대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성차별이 ‘젠더 갈등’으로 오해되고 둔갑하는 데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대다수 남성의 징병제에 대한 불만과 극소수 여성의 ‘사회적 성취’가 전반적인 젠더 현상으로 표상되지만, 이는 성별 ‘갈등’ 문제가 아니라 20대 남성과 ’성공한 50대 남성’의 자녀 간의 계급 문제이다. 80대 여성과 남성은 그들 사이의 성별보다는 다른 나이대의 시민들과 연령 차별 문제가 더 심각할지도 모른다. 65세 이상 시민들의 대중교통 무임승차를 둘러싼 갈등이 대표적이다.

언어 사용 문제도 지적합니다. 성희롱은 영어로 ‘sexual harassment’이죠. “성희롱이라니 외국어 번역어 가운데 ‘성희롱’만큼 심각한 오역도 없을 것이다. 동사 harass는 ‘학대하다, 함부로 하다. 지속적으로 괴롭히다’ 등 ‘질 나쁜 폭력’을 뜻한다. 그러나 성적인 농담, 희롱으로 번역되면서 가벼운 의미의 ‘수작, 집적거림, 지분거림’으로 변질되었다. ‘성희롱’은 가해자에게 범죄를 장난이나 실수로 정당화할 수 있는 권력을 부여했다.”

2005년 출간작인 <페미니즘의 도전>은 “사회 정의로서 여성주의를 소개”했습니다. 새 책은 18년 전과 달라진 여성주의 담론을 분석합니다.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한계 없는 자본주의, 인류세 시대의 한국 사회 페미니즘에 대한 억압과 금기, 반발”에 관한 글들이 이어집니다. ‘혐오 수준에 가까운 남성 문화의 젠더 문해력’이나 여전한 가부장제의 억압, ‘페미냐는 심판’ 등을 비판합니다. 차마 읽기 힘든 현실이나 지금도 되풀이하는 역사 이야기도 많습니다.

‘다시 도전’이라는 말이 나타내듯 논쟁의 지점도 많은 듯합니다. 정희진은 “논쟁의 불씨가 되는 텍스트이길 바란다”고 말합니다.

책은 부록으로 정희진이 석사과정 1학기 때 쓴 첫 논문 ‘죽어야 사는 여성들의 인권 - 한국 기지촌 여성운동사 1986〜1998’도 실었습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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