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폰이 80년내내 혁신할 수 있을까…그 대답은 이 와인이 한답니다 [전형민의 와인프릭]

전형민 기자(bromin@mk.co.kr) 입력 2023. 12. 2. 21:21 수정 2023. 12. 12.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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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혁신의 아이콘 ‘사시까이아’
오너에게 직접 듣는 80년 혁신사
1세대 아이폰을 소개하고 있는 스티브 잡스. [출처=SHUTTERSTOCK]
2007년 1월 8일 오전 9시, 비쩍 마른 체구의 백인 남성이 성큼성큼 한 연단에 오릅니다. 검은색 터틀넥과 아무런 워싱도 없은 평범한 청바지를 입은 탓에 가뜩이나 밋밋해보이는 그의 차림새는 일견 추레해 보이기까지 했죠. 이윽고 그는 발표를 시작합니다.

 “살다 보면, 획기적이고 혁신적인 제품이 우리 모두의 삶을 바꿔놓습니다. (중략) 오늘 우리는 혁신적인 제품을 무려 3개나 선보이려 합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각각 3개의 제품이 아닙니다. 단 하나의 제품입니다. 우리는 이 제품을 아이폰이라고 부릅니다.”

짐작하셨듯이, 애플의 창업자였던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처음 세상에 알리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그의 말대로 아이폰은 우리 모두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았습니다. 불과 10여년 만에 우리는 스마트폰 없는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됐습니다.

이후 IT 시장은 격변을 일으켰고 애플은 시가총액 세계 1위의 기반을 다지게 됐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보다 더 소중한 혁신이라는 이미지를 얻게 됩니다. 단 한 번의 발표로 말이죠.

아이폰과 애플이 IT 분야에서 혁신의 아이콘이라면, 와인 업계에서의 ‘혁신’은 무엇일까요? 이미 와인프릭에서 한 차례 소개한 바 있는 슈퍼투스칸(Supertuscan) 입니다. 그 중에서도 슈퍼투스칸의 효시인 사시까이아(Sassicaia)는 혁신의 상징으로 불립니다. 와인계의 아이폰인 셈 입니다.(伊 ‘와인부심’ 슈퍼투스칸, 이건희 회장도 선물로 건넨 이유 참고)

오늘은 사시까이아를 탄생시킨 마리오 인치사 델라 로케타(Mario Incisa della Rochetta) 후작의 손녀이자 테누타 산 귀도(Tenuta San Guido·사시까이아를 생산하는 와이너리)의 현재 공동오너인 프리실라 인치사 델라 로케타(Priscilla Incisa della Rocchetta)씨와의 인터뷰를 통해 사시까이아에 대해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프리실라씨는 지난 11월 중순 한국을 찾았습니다.

마리오 인치사 델라 로케타 후작과 그의 아들 니콜로. [출처=Tenuta San Guido]
혁신의 아이콘, 사시까이아
사시까이아는 글로벌 와인검색 사이트, 와인서쳐에서 제공하는 ‘가장 많이 검색된 와인(Top 100 Most Searched-For Wines)’ 순위에서 6위를 유지하는 전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와인 중 하나 입니다. 1위부터 5위까지 전부 프랑스 와인인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이탈리아 와인의 대표라고 할 수 있겠죠. 무엇이 사시까이아를 이토록 유명한 와인으로 만든 것일까요.

사시까이아의 성공 스토리는 잘 알려져있으니 간단하게 핵심만 뽑아보겠습니다. 우선 사시까이아는 와이너리 부지를 선택하는 것부터 남들이 하지 않은 혁신적인 시도였습니다.

인치사 후작은 당시 와이너리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알려진 볼게리 지역 해안가의 소금기 먹은 땅, 자갈밭을 포도원을 세울 곳으로 점찍습니다. 그냥 무턱대고 우긴 게 아니라, 그에게는 남들이 보지 못한 환경, 떼루아(Terroir)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테누타 산 귀도의 포도밭 풍경. 저 멀리 바다가 보인다. [출처=Tenuta San Guido]
당시 이탈리아에서 외면받던 프랑스 품종을 가져와 심은 것도 혁신적인 행동입니다. 그 무렵 이탈리아 와인은 이미 국제 무대에서 주류가 아니었지만, 이탈리아인들은 자신들의 전통 품종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습니다. 이 때문에 전통 품종이 아닌 새 품종으로 빚은 와인은 품질에 상관 없이 국가가 정한 와인 등급에서 최하급을 받았죠.

인치사 후작은 최하급을 받을 것을 알면서도 남들의 눈치를 보기보단 자신의 소신을 선택합니다. 까베르네 소비뇽을 심은거죠. 여기엔 ‘볼게리의 떼루아엔 까베르네 소비뇽이 맞다’는 그 스스로 선택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처음 선보인 사시까이아 1945년 빈티지는 아주 심한 혹평을 받았습니다. 그 스스로가 당대 유명 와인평론가에게 보낸 편지에 “주변 지인들은 사시까이아를 역겹다고 평가했고, 난 큰 모욕감을 느꼈다”고 적었을 정도죠. 하지만 그는 사시까이아 만드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지속합니다.

결국 사시까이아는 첫 선을 보였던 빈티지로부터 23년이 지난 1968년 빈티지에서야 인정 받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인기를 끕니다. 여기서 또 한번 혁신이 등장합니다. 사시까이아의 성공을 본받아 이탈리아의 여러 와이너리들이 등급 체계를 무시한 채 국제 품종을 심기 시작하고, 이는 끝내 이탈리아 국가 인증 등급 체계의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결국 정해진 규칙을 바꾼 셈입니다.

테누타 산 귀도의 와인들. 왼쪽부터 레 디페제, 귀달베르토, 사시까이아. [사진=전형민 기자]
슈퍼투스칸? 큰 의미 두지 않는다
어느새 사시까이아의 성공은 60년 전의 이야기가 됐습니다. 그 사이 사시까이아를 만드는 테누타 산 귀도의 주인도 3대를 이어져 내려왔죠. 현재는 인치사 후작의 손자와 손녀 5명이 함께 공동운영하고 있는데, 프리실라씨는 그 중 한 명입니다.

그녀에게 가장 먼저 모든 와인 애호가들이 궁금했을 법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슈퍼투스칸의 효시로서, 사시까이아가 바라보는 요즘의 ‘슈퍼투스칸’은 무엇일까요? 내심 최근 슈퍼투스칸의 인기에 기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자칭 슈퍼투스칸들에 대한 일침을 기대했습니다만, 그녀는 “슈퍼투스칸이라는 용어에 대해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다소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이어 “과거 슈퍼투스칸은 이탈리아의 와인 등급 체계가 개정되기 전, 국제 품종을 썼다는 이유로 너무 낮은 등급을 받는 와인들을 정의하는 말이었지만, 이제는 체계 자체가 개편되면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면서 “이제는 슈퍼투스칸보다 각자의 브랜드로 불리고 있다”고 부연했습니다.

과거의 영광에 머무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사시까이아는 단순히 슈퍼투스칸으로 뭉뚱그려져 불릴 수 있는 와인이 아니라는 자부심이 느껴졌습니다.

사시까이아와 테누타 산 귀도의 당면한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프리실라씨는 세대 변화(generation change)라고 답했습니다. 그녀는 “사시까이아를 발명한 사람(마리오 인치사 후작)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원칙과 철학이 와인에 계속 지켜질 수 있는 것에 대해 항상 고민한다”고 말했습니다.

프리실라 인치사 델라 로케타. [사진=전형민 기자]
원칙과 철학이 유산…우리는 관리인일 뿐
그렇다면 인치사 후작이 남긴 핵심 가치는 무엇이었을까요. 꼭 지켜야할 양조 철학인 셈인데요. 그녀는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촌 남매들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라는 부연과 함께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했습니다.

“우린 이 지역에 총 2500헥타르(㏊)의 땅이 있지만, 오직 100㏊에서만 와인을 만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자연과의 조화로움을 지키는 선은 딱 이 정도까지 입니다.”

양조하는 와인에 자라난 토양과 기후가 가진 고유 성질인 떼루아를 잘 담아내는 게 중요한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환경의 조성이 필요하다는 설명입니다. 실제로 이들은 포도를 기르는 100㏊를 제외한 나머지 땅은 개간하지 않고 숲인 상태를 유지하면서 최소한의 관리만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세대(현재의 공동오너들)는 단지 잠시 관리를 맡은 관리인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며 “우리 가족의 중요한 유산을 큰 책임감을 가지고 다음 세대에게 온전히 넘겨주는 것 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사시까이아의 원재료가 되는 테누타 산 귀도의 까베르네 소비뇽 포도.
변화와 혁신, 트렌드를 선점하라
16년 전 스티브 잡스의 90여분 간의 키노트 스피치는, 비단 아이폰 뿐만 아니라 그의 발표와 옷차림 자체도 인기를 끌게 했습니다. 당장 대학가를 중심으로 숫자와 문자가 잔뜩 들어간 발표가 사라지고 간단하고 그림, 표 위주의 직관적인 발표가 성행했습니다. 또 젊은 층과 IT 업계를 중심으로 검은색 터틀넥과 청바지, 뉴발란스 운동화는 하나의 패션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잡스는 발표 말미에 “나는 퍽(Puck·아이스하키 공)이 있었던 곳이 아니라, 가야 할 곳으로 움직인다.(I skate to where the puck is going to be, not where it has been.)”는 전설적인 아이스 하키 선수, 웨인 그레츠키(Wayne Gretzky)의 명언을 인용했는데요. 그는 이미 트렌드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간파하고 있었던 셈 입니다.

사시까이아 역시 트렌드를 따라가기보다 스스로가 트렌드가 된 와인 입니다. 그리고 혁신의 아이콘으로 남아 현재까지 명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사시까이아는 조화와 지속가능성을 핵심 가치로 꼽았는데, 이 역시 낯선 단어가 아닌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요? 변화와 혁신을 시도한다면, 사시까이아와 함께 특별한 시간을 보내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기자가 흥미로운 와인 이야기를 재미있고 맛있게 풀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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