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가 낳은 중앙정보부, 청와대를 내려다보다[땅의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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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산 자락에는 19세기부터 일본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중앙정보부를 남산으로 통칭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애초 왜장대가 남산에 자리 잡은 것은 조선의 법칙에 어긋난 일이었다.
조선의 남산에는 민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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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일제는 남산에 촌락 형성하고 '왜장대'라 명명
예장대에서 비롯한 지명은 지금의 중구 예장동으로 이어져
5·16으로 생긴 중정, 청와대 보이는 남산에 놓여 아이러니
결국 10·26 겪고 서초구 내곡동 이전해 국정원으로 변경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서울 남산 자락에는 19세기부터 일본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애초 조선은 외국인이 한양에 사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절 조선은 몰려드는 외세의 압력을 막아낼 여력이 없었다. 하릴없이 거주를 허락하되 거주지는 한강 밑으로 제한한 게 최선이었다. 문화와 풍속이 다른 이들끼리 섞여 살면 싸울 게 뻔했기 때문이다.
통감 관저가 있는 자리와 그 주변 촌락 마을을 일제는 왜장대(倭將臺)라고 불렀다. 유래는 여러 설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진을 치고 성을 쌓은 곳이고, 이 주변에 장(場)이 서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정확한 사료나 기록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외려 조선의 예장대가 있던 지역이어서 유래했다는 추측이 유력하다고 한다. 예장대는 조선 후기 군인이 무예를 연마하던 무예장을 가리킨다. 이 터가 남산의 북쪽 면에 자리하고 있었고, 통감 관저를 비롯한 왜성대가 여기에 형성됐다. 발음이 유사한 예장대에서 따와 왜성대로 불렀다는 것이다. 지금의 예장동의 이름도 예장대에서 비롯했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왜장대는 자취를 감췄다.
애초 왜장대가 남산에 자리 잡은 것은 조선의 법칙에 어긋난 일이었다. 조선의 남산에는 민가가 없었다. 남산에서는 경복궁이 내려다보이기 때문이다. 백성은 왕보다 높은 데 머물 수 없었다. 특히 왜장대가 있던 북쪽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일인들이 모여들면서 이 법칙이 깨졌다. 당시 조선 국력이 얼마큼 쇠락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철권통치 시대, 중정이 남산 북쪽에 들어선 것도 아이러니다. 윤보선 대통령은 1961년부터 집무실로 쓰던 경무대를 청와대로 바꾸었다. 직후 중정이 남산에 자리 잡으면서 청와대를 내려다보는 꼴이 됐다. 중정이 박정희 대통령 시절 정권 유지의 역할을 한 점에 비춰 보면, 불편한 위치일 수 있다.
이후 김재규 중정부장은 1979년 10·26을 일으켰다. 후신 국가안전기획부는 1995년 서초구 내곡동으로 옮겨가 지금의 국가정보원으로 기능한다. 예전 예장동 중정 건물은 서울유스호스텔(본부), 문학의 집(관저), 종합서울방재센터(별관), 서울시청 별관(수사국)이 됐다.
전재욱 (imfew@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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