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의 도발]영화 ‘서울의 봄’이 묻는다…“그게 국회냐?”
혈압 올라가기 딱 좋다는 영화 ‘서울의 봄’을 나도 보았다. 1979년 12월 12일 군사반란의 그날,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역할로 나온 정우성(극중 이태신)이 반란군 진압 출동을 막는 부하에게 “방패막이면 어때! 내 눈앞에서, 내 조국이 반란군한테 무너지고 있는데! 끝까지 항전하는 군인 하나 없다는 게… 그게 군대냐?” 눈을 부릅뜨는데… 눈물이 솟구치는 것이었다.
‘서울의 봄’은 보는 이들마다 다양하게 읽히는 영화다. 혈압이 치솟았던 이유가 내겐 업(業)의 엄중함 때문이었다. “저게 국방장관이냐?”(영화에서 국방장관은 한미연합사에 몸을 피하고는 “I‘m fine, thank you. And you?” 요런다). “저게 장군이냐?” 심지어 “저게(아니, 저런 분이) 대통령이냐?” 싶어 나는 분기탱천했다.
● “항전하는 군인 하나 없으면 그게 군대냐”
장태완 장군은 월간조선 2010년 1월 인터뷰에서 “최규하 대통령, 노재현 국방장관만 자리를 지켰다면 군사반란을 막았을 것”이라고 했다(그는 그해 7월 별세했다).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등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계엄사령관)을 연행하게 해달라고 사후 결재를 강요할 때 안 된다고 불호령을 내렸어야 했다는 것이다. “무엇이 두려운지 대통령은 도피한 장관만 찾으면서 반란을 초동 진압할 기회를 놓쳤다”며 “이것은 직무유기”라고 장군은 분명히 말했다.
물론 대법원은 1997년 정승화 강제연행이 위법이라고 판단했다. 정승화가 뒤집어썼던 내란방조죄도 무죄 판결을 내놨다. 장군의 아들 정홍열은 2002년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 나온 자서전 ‘대한민국 군인 정승화’ 발간사 첫머리에 “나는 어제도 군인이었고, 오늘도 내일도 군인일 따름이다”라는 장군의 발언을 소개했다(공교롭게도 1979년 10월 28일 새벽에 전화로 들은 얘기란다). 책 속에는 ‘청와대나 정보부, 보안사 등만 뺑뺑 돌면서 진급은 제일 먼저 하는 군인은 군인도 아니다. 예편시켜야 한다’는 내용도 있다. 바로 그 군인도 아닌 군인들, 하나회 우두머리 전두환을 12월 13일 좌천시키려다 하루 앞서 강제연행 당한 것이 12·12 쿠데타였다.
● 국방장관답지 않은 장관을 앉히면
당시 대통령 최규하가 군부에 문외한이면, 4성 장군 출신 국방장관이라도 군을 장악해야 했다. 그러나 노재현은 전두환의 정승화 조사 건의뿐 아니라 정승화의 전두환 인사조치 건의 도 묵살했던 무책임한 인물이었다. 심지어 12·12 총소리가 터지자 냅다 피신해선 대통령이 찾아도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어떻게 가느냐”며 나타나지 않았다(만약 전쟁이 터졌다면 어쩔 뻔했나 싶다).
시사인이 2016년 12월 공개한 장태완의 ‘12·12전후 10시간의 기록’에 따르면, 79년 12월 13일 오전 3시경 반란군 부대가 서울을 완전 장악한 다음에야 그는 애타게 찾던 국방장관의 전화를 받는다. 장관의 첫마디는 “장태완! 너는 왜 자꾸 싸우려고만 하나?”였다. 그러더니 “부대를 철수시키고 상황을 끝내! 내 지시를 따라!”하곤 끊더라는 거다.
그러고도 최규하는 12·12가 일단락된 다음 날 공화당 총재 김종필에게 전화를 걸어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총재님이십니까? 저 어젯밤에 죽을 뻔 했시유!”(김종필 증언록2).
● “역사는 멋진 인물들의 합리적 판단으로 나오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고관대작들이, 5공 실세들이 처음부터 못난 인물이었다고는 믿고 싶지 않다. 영화에서도 그러지 않던가. 전두광 역할의 배우 황정민이 반란을 모의할 때, 연희동 집에서 카리스마를 뿜뿜 내뿜으면서.
“여기 대령 이하 잘 들어라. 니들 솔직히 서울대 갈 실력 됐잖아? 근데 왜 육사 왔어? 다 집에 돈 없고 빽 없어서 먹이고 재워 주는 육사 온 거 아니야? 근데 여까지 와가 저딴 똥별 새끼들 때문에 옷 벗으면 느그들 억울해 안 해? 눈까리 똑바로 쳐들고 들으라고! 억울해 안 해?!! 그러니까 대한민국 군대 한 번 대차게 바꿔보자는 거 아니야!”(그래서 김충식의 ‘남산의 부장들’에 따르면 당시 주미대사관에 근무하던 외교관 H는 “한국군에는 항상 ‘커널’(대령)이 문제”라고 증언했다).
김성수 감독이 본 12·12 군사반란은 그저 권력에 눈먼 인간들의 욕망이 만든 결과였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거창하게 쓰여진 어떤 역사는, 그 순간 개입한 많은 이들의 돌발적인 생각과 가치관, 됨됨이가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역사책에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읽히는 필연의 역사가 실은, 멋진 사람들의 합리적 판단을 거쳐 나오는 게 아니란 감독의 통찰은, 섬뜩하다. 심지어 그는 “이런 일은 지금도, 늘 벌어진다”고 했다(그래서 더 섬뜩하다).
● 연성 파시즘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한 문재인 정권
영화를 종종 정치에 이용하는 더불어민주당은 ‘서울의 봄’을 보고 반색을 한 모양이다. “군복 대신 검사의 옷을 입고, 총칼 대신 합법의 탈을 쓰고 휘두르는 검사의 칼춤을 본다”(정청래) “하나회가 검란을 일으켰던 검찰 특수부와 오버랩됐다”(민주당 출신 무소속 김남국)며 ‘윤석열 검찰독재’를 전두환 신군부독재와 동격으로 놓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당 검찰독재정치탄압대책위원회산하 검사범죄대응TF 팀장 김용민 의원은 “윤 정권이 내년 총선에서 이기면 계엄을 선포하고 독재를 강화하려고 할 것”이라고까지 주장했다. 그는 10월 출범 때 이미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과 검사 출신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활용하고 있는 검찰이 대한민국과 민주주의를 광범위하게 파괴하고 있다”며 검사 탄핵을 예고했다.
그리고 또 어쩌랴. 44년 전 신군부는 총칼로 권력을 찬탈했지만 21세기 선출된 독재자는 사법부를 비롯한 제도와 기관을 자의적으로 바꿔선 겉으론 합법적으로 보이게끔 민주주의를 무너뜨린다. 그게 연성 파시즘이다. 지난 문재인 정권 시절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책을 인용해 나도 팔이 아프게 썼던 민주주의 파괴 말이다.
● 이념 사조직이 지배하는 사법부 “네가 판사냐?”
‘민주주의를 부드럽게 죽일 수 있는 세계적 공식이 궁금한가. 심판 매수! 언론을 시작으로 사법부와 검경, 정보기관, 국세청, 선거관리위원회, 통계청 등의 중립적 기구에 충성스러운 측근을 들여보내 자연스럽게 장악하는 거다.’ 2019년 1월 첫 ‘도발-독재자 감별법을 아십니까’에서 내가 썼던 대목이다. ‘검경’ 에서 문재인 당시 대통령(너무 길다. 이하 文)이 임명한 윤석열 검찰총장은 결국 못 참고 “상식과 공정, 법치를 내팽개쳐 나라의 근간을 무너뜨렸다”며 무도한 문 정권 타도에 나섰고, 마침내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 그리곤 文이 쌓아놓은 쓰레기 치우기에 허덕이는 상황이다.
일주일에 몇 개인 지도 모를 재판에 출석하는 민주당 당대표 이재명이 재판 중 농땡이를 부리는 것도 믿는 구석이 있어서다. 대선 때 이재명이 대장동 핵심 실무자를 “몰랐다”고 말했던 선거법 위반 사건은 당선무효형에 해당하는 벌금 100만 원 이상의 형이 확정될 경우, 공직선거법과 국회법에 따라 의원직을 잃고 5년간 피선거권도 제한돼 차기 대선에 출마할 길도 막히는 엄청난 재판이다. 민주당이 선관위로부터 보전받은 대선 선거 비용 약 434억원도 토해내야 한다. 그런데 김명수가 만든 사무 분담 내규 등에 따르면 내년 2월 재판장이 바뀔 공산이 크다. 그러니 이재명이 하품을 안 하겠느냔 말이다.
● 예산안 팽개치고 탄핵 처리한 국회 “너희가 의원이냐?”
영화 속 최고의 대사는 단연 이 대목이다. 전두광이 으스대며 하는 말. “인간이 명령 내리기 좋아하는 거 같지? 인간이라는 동물은 안 있나, 강력한 누군가가 자기를 리드해주길 바란다니까?”
민주당은 1일 국회 본회의에서 이재명 관련 수사 책임자였던 이정섭 대전고검 검사 직무대리와 손준성 대구고검 차장검사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단독 처리했다. 656조 원 규모의 내년 예산안 헌법상 처리 시한(2일)은 젖혀 놓고, 숱한 범죄 혐의로 재판 중인 당 대표 ‘방탄 탄핵’에 올인한 의원들 모습이 마치 내년 총선 공천을 앞두고 ‘강력한 누군가가 자신들을 리드해주길 바라는’ 꼬라지와 겹쳐 보인다.
그래서 묻고 싶은 거다. 수박으로 찍힐까 두려워, 이재명한테 찍힐까 겁나서, 이미 감찰받고 재판받는 검사나 탄핵하는 당신들이 무슨 국회의원이냐고.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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