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만에 또 가도 좋았던…전통·자연 느낀 ‘느린 여행’ [ESC]

한겨레 2023. 12. 2.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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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김남희의 걷다 보면]김남희의 걷다 보면 루마니아
루마니아 북부의 작은 마을 브레의 아름다운 풍경.

가슴을 뒤흔든 풍경을 다시 마주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지. 겨울 준비가 끝난 가을 들판에 서서 해 뜨는 마을을 바라보았다. 새벽이슬에 젖은 건초 더미 너머로 굴뚝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세상의 모든 소란이 견고한 막으로 차단된 것 같은 시간에 나는 루마니아 북부의 작은 마을 브레브에 서 있었다. 작년 가을에 이어 두 번째 찾은 루마니아는 여전히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지난달 ‘방과후 산책단’을 이끌고 루마니아에 다녀왔다. 늘 바쁜 한국인은 여행할 때 선택과 집중에 서투른 경우가 많다. 하나라도 더 보겠다는 욕심에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빡빡한 일정으로 다니거나, 짧은 일정에 너무 많은 곳을 이동하느라 긴 시간을 쏟기도 한다. 내 기억에 오래 남은 여행은 욕심을 버리고, 속도를 늦췄을 때 찾아오곤 했다. 방과후 산책단을 꾸릴 때도 이 원칙을 지키려고 애쓰기에 이번 루마니아 산책단도 보름의 여정이었다. 산책단원들은 한 번씩 이런 말을 들었단다. “루마니아에 왜 가?” “2주나 볼 게 있는 나라야?” 심지어 한국에 사는 루마니아 사람조차도 루마니아에 왜 가냐고 물었단다. 그런 말을 들을수록 루마니아의 매력을 제대로 전하고 싶다는 의지가 활활 타올랐다.

루마니아의 명물 ‘즐거운 묘지’

작년 루마니아 여행 중에 만나 친구가 된 안드레아가 그녀의 고향인 브라쇼브에서 우리의 가이드를 자처했다. 소설 ’드라큘라’의 모델이 된 브란성과 펠레슈성을 둘러본 다음 날, 우리는 그녀를 따라 탐파(틈파)산에 올랐다. 공기는 맑았고 햇살은 투명하게 빛나는 가을날이었다. 네 시간쯤 걷고 난 후에 먹는 점심은 달았다. 그날 오후, 안드레아가 집으로 우리를 초대했다. 브라쇼브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자리한 집은 그녀가 만든 작품으로 가득했다. 그 모든 작품의 소재가 자연에서 난 것들이었다. 바닷가에서 주운 조개껍데기, 숲의 나무 열매, 들판의 풀잎 같은. 아무것도 아닌 소재로 특별한 작품을 만들어 내는 감각이 빼어났다. 유엔난민기구의 엔지니어로 일하는 그녀는 최근 2년 우크라이나에서 근무했다. 일주일에도 서너 번은 지하 벙커로 피신하는 고단한 날들이었다. 생존이 목표인 거친 현장에서 일하기 때문에 집에 머물 때는 주로 자연의 소재로 작품을 만들거나 산에 오르며 마음의 평화를 찾는 걸까.

마라무레슈에 있는 목조교회인 ‘성 대천사 미카엘과 가브리엘의 그리스 가톨릭 교회’.

시기쇼아라, 시비우를 거쳐 찾아간 곳은 마라무레슈 지역. 첫 루마니아 여행에서 내 마음을 가장 뒤흔든 곳이 마라무레슈였다. 산으로 둘러싸여 고립된 마을이 간직한 전통문화,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자연환경,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목조 교회, 무엇보다 강인하고 다정한 여성들에 매료되었다. 숙소는 모두 지난해 머물렀던 곳을 통째로 빌렸다. 그 첫 번째는 도예가인 다니엘과 총명하고 부지런한 아내 다니엘라가 꾸려가는 곳이다. 이곳에서의 첫 프로그램은 이 지역 전통 빵 만들기. 다니엘라의 시어머니가 파티시에다. 처음에는 이스트와 소금, 밀가루만을 넣은 빵을 만들고, 그 빵이 화덕에서 구워지는 동안 도넛을 만들어 튀겼다. 빵은 당연히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설탕 뿌린 도넛은 말할 것도 없고. 숙소로 돌아오니 다니엘라가 물었다. “빵 만드는 거 어땠어?” “너무 재밌었어. 근데 사실 너희 시어머니가 다 하셨고 우린 한 게 없어.” 다니엘라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적어도 너희가 망치진 않았잖아.” 우리가 망치지 않은 빵을 곁들여 다니엘라가 동네 여성들과 준비한 저녁을 먹은 후 지역 음악가들을 초청해 집에서 작은 음악회를 열었다.

마라무레슈 숙소에서 열린 작은 음악회.

바이올린과 아코디언의 흥겨운 연주를 들으며 루마니아 와인을 곁들이는 동안 밤이 깊어져 갔다. 다음날은 루마니아에서 가장 유명한 묘지인 ‘즐거운 묘지’를 찾아갔다. 파랗게 칠한 참나무 십자가 위에 고인의 삶과 직업을 그림으로 그리고, 재치 있고 시적인 묘비명이 적힌 800여개의 무덤. 이 묘지는 죽음이라는 작별에 유머러스한 분위기를 더하고 싶었던 민속 공예가 스탄 이오안 퍼트라슈의 주도로 1935년에 시작됐다. 죽음을 슬퍼하는 대신 고인이 지나온 삶을 축하했다는 다키아 부족 문화에서 영감을 얻었단다. 무덤의 묘비명은 이 지역 방언으로 적혀 있어 해석이 어렵다. 구글 번역기로는 원래의 위트 넘치며 시적인 분위기가 전혀 살지 않아 안타깝다. 가장 유명한 묘비명 한 편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이 무거운 십자가 아래/ 가엾은 시어머니 누워 계시네/ 그녀가 사흘만 더 살았다면/ 내가 죽어서 이 묘비명을 읽으셨을 텐데…// 여기 지나가는 당신/ 깨우지 말아 주세요/ 그녀가 돌아오면/ 나를 더욱 비난할 것이니까요// 나는 그녀가 지옥에서 돌아오지 않을 정도로/ 잘 행동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시어머니, 여기 계십시오.” 며느리의 진정성이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가감 없이 전해진다.

루마니아에서 가장 유명한 묘지인 ‘즐거운 묘지’.

찰스 3세가 부동산 보유한 이유

마라무레슈에서의 두 번째 마을은 브레브. 이 마을이 유명해진 건 영국인 윌리엄 블래커 덕분이다. 1989년, 우크라이나를 여행하던 그는 우연히 국경을 넘어 마라무레슈 지역에 발을 딛게 되었다. 눈앞에 펼쳐진 원시림, 자연의 속도에 맞춰 느리게 흘러가는 소박한 삶에 반해 그는 이곳에서 8년을 살았다. 동창생 찰스 3세(지금의 영국 왕)를 설득해 이곳의 전통문화를 지키기 위한 재단도 설립했다. 찰스 왕이 이 마을에 두 채의 집을 소유하게 된 계기다. 윌리엄 블래커 다음으로 브레브를 찾아온 외국인이 영국 여성 페니였다. 2003년, 페니는 남편과 세 아이와 함께 이곳에 정착했다. 그 무렵 전통적인 목조 주택은 인기가 없어 마을 사람들은 그들에게 집을 공짜로 안겨줬다. 전기도, 수도도 끊긴 폐허에 가까운 집에 들어가 살면서 하나씩 고쳐 나갔다. 그런 삶이 가능했던 건 그녀가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이집트의 시골에서 이미 그렇게 살아봤기 때문이었다. 고립된 지역으로 들어가 전통문화를 지키며 꾸려가는 삶이 페니에게는 고단하지만 기쁘고 보람 있었다. 몇 년 전까지 이곳에는 식당도 하나 없어 그녀는 순번을 정해 마을 여성들의 집으로 손님을 보내곤 했다. 지금은 이 작은 마을에 게스트하우스만 50개. 식당도 두 개가 생겨났다. 그사이 페니는 영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남편과 헤어지고, 장성한 세 아이를 독립시키고, 혼자서 꿋꿋이 게스트하우스를 꾸려가고 있다.

50년에서 거의 200년이 된 세 채의 전통 가옥은 마룻바닥이 삐걱거리고, 화장실은 비좁고, 조금씩 뒤틀린 문을 여닫기도 힘들지만 너무나 사랑스럽다. 세월에 반질반질해진 서까래 위에 걸린 밝은색의 자수 천이 방에 온기를 더한다. 요정의 집에라도 들어온 것 같다. 표준화된 체인 호텔은 절대로 줄 수 없는 안온함을 가진, 살아있는 집. 이 아름다운 집을 가꾼 페니에게는 꿈이 하나 있다. 머지않은 미래에 당나귀 한 마리를 사서 안데스산맥을 넘나들며 여행하는 꿈이다. 나는 그녀의 꿈이 꿈으로 그치지 않을 거라는 걸 믿고 있다.

브레브에 정착한 영국 여성 페니의 전통 목조 가옥에서 ‘방과후 산책단’이 식사하며 대화하는 모습.

마라무레슈 지역은 참나무로 지어진 목조 교회로 유명하다. 16세기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석조 교회 건축을 금지하면서 지어진 교회들이다. 300개가 넘는 목조 교회가 세워졌지만 이제는 100여개만 남았고, 그중 8개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일요일 아침, 가장 아름다운 교회로 꼽히는 바르사나(브르사나) 교회를 찾아갔다. 우리가 지닌 제일 좋은 옷을 차려입고 예배를 드렸다. 찬 바람이 부는 야외에서 선 채로 두 시간 동안 이어진 예배는 더없이 경건했다. 불교 신자도, 종교가 없는 이도, 가톨릭도, 개신교도 모두 함께 서서 수녀님의 성가에 귀를 기울였다. 더 많이 가지기를 욕망하지 말고 이미 충분히 지닌 것에 더 감사하자고 다짐하면서. 저마다 촛불을 밝히고 가족과 이웃의 건강, 팔레스타인 땅의 평화를 간구했다. 나는 종교를 믿지 않지만, 기도의 힘을 믿는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위대한 점은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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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가 민박에서 직접 만드는 음식 맛

전통옷을 차려입고 브르사나(바르사나) 교회로 예배를 드리러 온 주민과 아기.

루마니아에서의 마지막 여정은 부코비나. 마라무레슈가 목조 교회로 유명하다면 이곳은 채색 수도원으로 이름난 곳이다. 세계유산에 등재된 채색 교회보다 더 내 마음을 끈 곳은 안젤리카와 시미온의 집.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각각 산림공학자와 도시공학자로 일하던 부부가 시미온의 고향인 이곳으로 귀향한 건 2007년. 부부는 한 채씩 목조 가옥을 늘려가며 농가 민박을 꾸려갔다. 공산주의 시절에 빼앗겼던 할아버지의 집을 다시 사들여 그 집에 살던 가족 이름(카사 돔니카)을 붙이고, 그 가족의 사진으로 벽을 장식했다. 시부모님이 사시던 집은 시어머니의 이름을 딴 카사 라힐라. 포도나무와 포도주를 좋아하던 시아버지를 기려 그 집의 모든 장식품(커튼, 테이블보, 잔 등)에는 포도 문양이 담겨 있다. 방에는 먼지 한 톨 없고, 새하얀 침구는 빳빳하다. 안젤리카는 시어머니와 시할머니가 만든 수공예품으로 집안을 장식하고, 시어머니의 레시피로 비스킷을 만들고, 시할머니의 레시피로 케이크를 구워 손님상에 올린다.

부부에게는 딸린 식구가 제법 많다. 소 세 마리와 양 여섯 마리에 돼지도 스무 마리(우리가 오기 전날 암퇘지가 새끼를 일곱 마리나 낳아 갑자기 식구가 불었다)나 있다. 가축은 너른 초지에 방목해서 키우고, 축사에는 짚이나 진흙을 깔아 편안한 환경을 제공한다. 닭 예닐곱 마리와 개 세 마리, 길고양이 대여섯 마리도 함께 산다. 아침 식사 테이블에 올라오는 치즈와 버터, 우유, 요거트, 살라미와 초리소는 부부가 키우는 가축에 기대어 직접 만들었다. 평소 우유를 마시지 않는 나도 이곳에서만큼은 신선하고 고소한 우유를 한 잔씩 마셨다.

저녁 식사는 시미온이 담근 브랜디와 와인, 수프부터 시작해 메인과 디저트까지 나오는데 대부분의 재료가 숲과 이 집의 정원에서 난 것들. 끼니때마다 탄성을 내지르며 음식에 탐닉하고 만다. 안젤리카와 시미온의 집에서 우리가 베푼 작은 호의는 드넓은 정원의 채 따지 못한 사과를 딴 일.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 공산주의 선전 문구 같은 구호 아래 예닐곱 명이 달라붙어 30~40분간 사과를 따니 무려 여덟 상자. 저녁 준비로 바쁘던 안젤리카와 시미온이 연신 “브라보”와 “생큐”를 외쳐주니 어찌나 뿌듯하던지.

루마니아에서는 시를 읽는 밤이 자주 찾아왔다. 아무도 가지 않는 나라여서 루마니아에 오고 싶었다는 ‘케이(K)쌤’ 덕분이었다.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차분히 읽어주시는 시 한 편이 우리의 밤을 환하게 밝혀주곤 했다. 안젤리카의 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케이쌤은 미리 인쇄해 온 종이를 한 장씩 나눠줬다. 고정희 시인의 ‘쓸쓸함이 따뜻함에게’라는 시였다. 장작불이 지펴진 난롯가에 모여 앉아 한 사람씩 돌아가며 시를 읽었다. 케이쌤은 낭송이 끝난 후 이렇게 이야기했다. “여기 루마니아까지 여행을 올 수 있었던 우리는 그래도 따뜻한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니까, 쓸쓸한 사람들에게 온기를 나눠주며 살아가면 좋겠어요.” 정원의 사과나무 가지를 휘돌아온 바람이 부드럽게 창을 두드리는 밤이었다.

글·사진 김남희 여행가

여행가 김남희는 2003년 이후 유목민의 삶을 살아오고 있다. 언젠가는 앉아서 유목하는 경지에 오르기를 바라면서, 지은 책으로는 ‘길 위에서 읽는 시’, ‘여행할 땐, 책’, ‘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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