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부른 ESG 의무 공시, 국내 기업에겐 '毒' [FN 재계노트]
FN 재계노트는 재계에서 주목하는 경제 이슈와 전망을 전문가 시각에서 분석하고, 이를 독자들에게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주>
[파이낸셜뉴스] 최근 환경·사회·지배구조(ESG)가 자율실천에서 '제도화' 단계로 고도화되면서 국내 기업들이 느끼는 부담이 커지고 있다. ESG 제도화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ESG 의무공시다. ESG 의무공시는 기업들이 매출액이나 영업이익 등 경영실적을 외부에 공개하는 것처럼 탄소 배출량과 같은 비재무 정보도 의무적으로 외부에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금융위에서 2026년 이후부터 의무공시를 시작하겠다는 발표가 나왔지만 여전히 의무화 일정이 논란이다. 의무화 일정을 늦추지 말자는 쪽의 주장은 이미 2025년부터 의무화를 시작하기로 했으니 늦추면 대외 신뢰도에 부정적이라는 것이다. 반면 의무화 일정을 충분하게 유예하자는 쪽은 기업들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현실을 감안해서 서두르지 말자는 것이다.
대부분의 국내 기업들은 글로벌 ESG 공시기준을 따라야 한다는 것에는 원칙적으로 공감한다. 그리고 이를 반영하듯 최근 자율적으로 지속가능성보고서 발간을 통해 ESG 의무공시 준비에 나서는 기업들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실제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2021년에 73개사였던 지속가능성보고서 발간기업이 2022년에는 131개사로 증가했고, 금년에는 9월까지 152개사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의무공시에 직접 대응해야 하는 기업들 입장에서 보면 충분한 준비기간을 가져야 하는 3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선진국들이 아직 ESG 의무공시 도입에 적극적이지 않다. EU에서 공시 세부 표준인 ESRS가 확정됐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공시 로드맵을 내놓은 국가는 없다. 그리고 ISSB는 기업부담 경감을 위해 S1 시행 의무화를 1년 유예했고, EU도 ESRS의 second set 시행을 2년 연기하면서 의무공시 시작을 늦췄다.
ISSB의 ESG 공시 로드맵 도입을 발표한 싱가포르는 금융·서비스, 호주는 낙농업·광업 위주 국가여서 제조업 중심인 우리나라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일본의 경우도 우리나라의 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KSSB)에 해당하는 SSBJ에 따르면 2025년 3월에 공시 로드맵을 발표할 예정이다.
특히, 다른 선진국들에 앞서 섣불리 ESG 공시 의무화에 나섰다가 부작용을 초래할 수도 있다. 국내 기업들의 공시결과가 부실하게 나오면 오히려 국내 기업들의 대외 신뢰도 저하로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둘째, 협력사들의 데이터 신뢰성이 낮다는 것도 문제다. 대기업들이 공급망내 있는 협력사들의 부실한 탄소배출량 데이터를 가지고 공시했다가 문제가 생겼는데 책임지라는 것은 불합리하다. 최소한 협력사들의 탄소배출량 데이터가 신뢰할 수 있는 수준이 돼야만 대기업들의 공시도 신뢰성을 높일 수 있다.
셋째, 국내 ESG 인증 인프라가 부족한 것도 공시의무화를 서두르면 안되는 이유다. ESG 공시가 의무화 되면 지속가능성보고서의 제3자 인증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현재 국내 탄소배출량 검증업체는 13개사, 검증 자격증 보유자는 200여명 수준으로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부족하다. 탄소배출량 검증업체가 많지 않은데 업체 간 측정기준까지 달라서 기업들은 혼란스럽다.
ESG 의무공시는 우리 기업들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의무공시에 많은 준비가 필요한 만큼 현실에 맞춰 속도 조절을 해야 한다. 정책당국에서 공시기준과 범위 등 명확한 가이드라인과 지침을 마련해 주고, 충분한 준비 기간을 제공해 우리 기업들이 의무공시에 적절하게 대응해 나갈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해 주기 바란다.
/윤철민 대한상공회의소 ESG경영실장
※이 글은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이며,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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