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냉전 시대 군비 경쟁…무기 발전으로 ‘손쉬운 전쟁’
고삐 풀린 글로벌 군비 통제
2,900,000,000,000,000. 지난해 인류가 쓴 군사비 총액을 원화로 환산한 숫자다. 보통 사람의 감각으론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천문학적 금액이다. 2022년 세계 군사비 지출이 사상 최고치인 2조2400억달러(약 2900조원)를 기록했다. 전년도(2조1130억달러)에 사상 처음으로 2조달러를 넘어섰고, 2015년 이후 8년 연속 증가 추세다. 스웨덴 싱크탱크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 이하 시프리)가 매년 봄 각국 정부의 ‘공식’ 자료와 무기 시장 등을 집계·분석한 결과다. 지난해 군사비 급증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최대 원인이었다. 세계 군사비의 실제 규모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 블랙마켓, 비공식 무기 거래와 인적 비용을 포함하면 공식 수치보다 훨씬 클 것으로 추정된다.
소련 무너지고 반토막…2015년부터 증가세
최근 10년 새 지구촌 ‘판도라의 상자’가 점점 크게 열리고 있다. 군비(군사시설과 장비) 통제의 고삐가 풀리면서 인류의 위기감도 부쩍 커지고 있다. 2021년 8월 미국이 20년에 걸친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끝내고 전면 철군한 것은 별 도움이 안 됐다. 불과 6개월 뒤인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격 침공하면서 또다시 대규모 전장이 형성되고 무기 수요가 급증했다. 러시아는 2014년에도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크림반도를 자국령으로 빼앗은 바 있다. 그 뒤 10년 새 유럽에선 대다수 나라가 국방비를 극적으로 늘려왔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유럽 회원국의 군사비 지출은 2014년 1450억유로에서 2023년 2150억유로(약 304조원)로 50% 가까이 급증했다. 군사비 증가의 대부분은 무기·장비 획득 비용이었다. 올해 들어 지난 10월까지 나토 유럽 회원국이 무기 구매에 쓴 돈만 646억유로(약 91조원), 10년 전과 견줘 270%나 폭증했다.
시프리가 집계한 최근 35년의 세계 군사비 추이를 보면 국제 안보의 큰 흐름이 보인다. 1988년 1조5천억달러(이하 2021년 기준 물가 보정 환산치)였던 군사비는 1991년 소련이 무너지고 냉전이 종식되면서 약 6900억달러로 반토막이 났다. 이듬해 세계 군사비 지출은 회복됐지만, 20세기 말까지 10년 동안은 지속적인 내림세를 보였다. 그러나 2001년 9·11 테러 직후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군사비는 향후 10년간 다시 급증했다.
2011년 들어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끝내고 유럽 내 유로존(유로화 사용 국가) 회원국들의 재정 위기가 심각해지면서 세계 군사비 지출에도 잠시 제동이 걸렸다. 바로 그해에 러시아가 영국·프랑스를 제치고 군사비 지출 세계 3위로 올라섰다. 이듬해인 2012년 11월에는 중국에서 집권한 시진핑 국가주석이 ‘중국몽’(중화민국의 위대한 부흥) 비전을 제시하고 ‘군사굴기’로 불리는 군 현대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미국과 중국이 세계 패권을 놓고 겨루는 전략 경쟁의 신호탄이 올랐다. 세계 군사비 지출도 4년 연속 완만한 하락세를 멈추고 2015년부터 증가세로 돌아섰다. 1991년의 예외적 상황을 빼고 최저치를 기록했던 1998년(약 1조1천억달러) 이후 세계 군사비 지출은 24년 만에 2배로 치솟았다. 특히 중국의 군사비가 2012년 이후 2022년(2920억달러)까지 2배로 늘어나는 데 불과 1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최근 10년 새 세계 군사비 지출이 다시 치솟는 추세는 ‘신냉전’이라는 지정학적 변화를 반영한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임(2017~2020) 중 유럽 동맹국들에 국방비 지출을 국내총생산(GDP)의 2%까지 늘리라고 압박했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유라시아 제국의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겠다는 야심을 노골화하면서 유럽의 안보 위기를 부추겼다. 미국과 중국이 부딪치는 전략 경쟁도 한층 거칠어졌다. 1991년 옛 소련 붕괴 이후 30년 가까이 유일 초강대국 지위를 누려온 미국의 절대적 군사 우위가 쇠퇴하면서, 세계 각국이 안보 위기감 속에 군비를 확장하고 국제 규범의 구속력이 약해진 것도 한몫한다.
러시아의 폭주…핵전쟁 ‘군불’
세계 군사비 지출은 전체의 75%를 차지하는 미국·중국·러시아 등 상위 10개국을 중심으로 2024년에도 이어질 공산이 크다. 11월27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024년 국방예산을 올해보다 70% 늘린 예산안에 서명했다. 2024년 정부 지출 36조6천억루블(약 533조원)의 40%가 국방·보안 관련 예산이었다. 러시아는 이에 앞서 11월7일 유럽재래식무기감축조약(CFE)에서 공식 탈퇴했다. 러시아 외교부는 “이날 0시를 기해 러시아의 조약 탈퇴 절차가 완료됐다”며 “러시아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는 나토의 확장으로 조약이 유명무실해졌다”는 구실을 들었다. 러시아는 또 “오늘부로 러시아와 나토 회원국의 어떤 군축협정도 불가능하다”고 못박았다.
이에 맞서 나토도 즉각 해당 조약의 효력 중단을 선언했다. 같은 날 미국 백악관은 성명을 내어 “러시아가 조약에서 탈퇴하고 조약 당사국(중 하나)인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략전쟁이 계속되면서 상황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며 조약 의무 이행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이 조약은 냉전 말기인 1990년 서방의 군사안보동맹인 나토와 그에 맞선 소련 주도 바르샤바조약기구가 맺은 것으로, 전차·공격헬기·장갑차·대포 등 재래식 무기의 보유 목록과 수량에 제한을 뒀다. 러시아와 나토의 유럽재래식무기감축조약 파기는 군사 강대국들의 군비 경쟁이 자칫 치킨게임으로 치달을 우려를 낳는다.
올해 전세계 군사비 지출은 22개월째로 접어든 우크라이나 전쟁과 두달 가까이 이어지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그에 따른 각국의 군비 증강 등으로 지난해보다 더 늘어날 게 확실시된다. 각국의 연간 실제 국방비 지출은 통상 전년도 말이나 새해 초에 발표하는 예산안보다 늘어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전쟁을 수행했거나 지원한 나라의 국방비는 추가 편성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으며, 최종 지출액은 사후에 집계된다. 11월 미국의 진보 성향 사회평론지 ‘먼슬리 리뷰’는 2022년 미국의 실제 군사비 지출은 공식적으로 인정된 금액(7658억 달러)의 2배가 넘는 1조5370억달러에 이른다고 추산했다. 미국의 공식적인 군사비 지출액 규모는 연방정부의 예산 관리를 총괄하는 장관급 부처인 대통령 직속 관리예산실(OMB)의 발표에 근거한다. 그런데 이 데이터는 미국 경제 분석의 기초인 국민소득생산계정(NIPA)에 잡힌 수치보다 상당히 낮으며, ‘국방 지출’이 아닌 다른 범주에 포함된 군사비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봉인이 풀린 화약고가 재래식 무기에 국한되지 않는 것도 문제다. 최근 몇 년 새 핵무기 통제의 고삐마저 급격히 느슨해지고 있다. 러시아는 11월2일 모든 핵실험을 금지하는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의 비준도 전격 취소했다. 30여년 만에 핵실험 재개 가능성을 열어뒀다. 이어 9일에는 일본과 체결한 핵무기 군축 협력에 관한 협정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러시아가 국제조약이나 자체 결정으로 감축하는 핵무기의 안전한 폐기를 위해 양국이 협력하는 근거를 무력화하고 핵 위협의 수위를 극적으로 끌어올린 조처였다. 앞서 올해 2월 러시아는 미국과의 핵무기 통제조약인 신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뉴스타트) 참여 중단을 선언했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틈만 나면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되풀이하고 있다. 지난 6월엔 러시아의 끈끈한 동맹국이자 우크라이나의 북쪽 접경국인 벨라루스에 첫번째 전술 핵무기를 배치했다고 밝혔다. 러시아 관영 매체들은 푸틴의 핵 위협을 공공연히 지원하고 증폭한다. 11월 중순 러시아 국영 티브이 방송 로시야1의 시사토크 프로그램 진행자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는 “핵전쟁은 피할 수 없다. 일어날 거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폭탄 발언을 했다. 그는 “핵무기는 특정한 목표를 수행하며 (…) 비핵 국가에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인류의 핵 파멸로 이어지진 않을 것이다. 모든 군대(의 지휘부)는 전술핵무기 사용법을 공부한다”고 주장했다. 솔로비요프는 ‘푸틴의 목소리’라는 별명이 붙은 심복이다.
러시아만 핵무기를 만지작거리는 게 아니다. 2019년 미국의 트럼프 정부는 러시아의 지속적인 핵 위협을 이유로, 사거리 550㎞ 이상 핵미사일의 배치를 금지한 중거리핵전략조약(INF)에 더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다. 북한이 사실상 핵보유국 목록에 이름을 올리고 다양한 운반 수단의 개발과 성능 개선에 안달하는 것도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중대한 안보 위협이 되고 있다.
11월5일엔 ‘비공식 핵보유국’으로 확인도 부인도 않는 엔시엔디(NCND) 정책을 유지하고 있는 이스라엘에서도 핵 공격이 언급됐다. 베냐민 네타냐후 연정에 참여하고 있는 극우 유대교 정당 소속의 아미하이 엘리야후 예루살렘·유산 담당 장관이 라디오 방송에서 “가자지구에는 지금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본다. 핵 공격도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네타냐후 총리가 서둘러 진화에서 나섰지만 후폭풍은 컸다. 러시아 외교부의 마리야 자하로바 대변인은 “이스라엘의 핵 공격 발언이 많은 질문을 낳는다. 우리가 핵무기 보유에 관한 공식 설명을 들은 거냐?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사찰관은 어디에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러시아의 핵 위협에 대한 비난을 물타기 하는 역공이었다. 튀르키예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대량 학살을 저지른 테러 국가”라며 “핵폭탄 보유를 공식 인정하라”고 압박했다.
“ 팔레스타인, 이스라엘의 무기 실험장”
전쟁터는 가공할 살상무기의 실험장이자 잠재적 구매자의 관심을 끄는 기회이기도 하다. 팔레스타인 가자 전쟁이 시작된 지 보름이 지난 10월22일, 이스라엘군은 자국 방산업체 엘비트 시스템스가 개발한 신형 정밀 유도 박격포탄 ‘아이언 스팅’을 실전 배치하는 영상을 공개했다. 이 업체는 2021년 이스라엘군에 통합된 뒤부터 웹사이트에서 “레이저와 지피에스(GPS)를 이용해 표적을 정확히 타격하고 부수적 피해를 줄인다”며 이 무기를 홍보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군용 드론과 주력 메르카바 전차, 아이언 돔 미사일 요격 시스템은 세계 무기 시장에서 인기 품목이다. 지난 5월 이스라엘 일간 하아레츠는 “최근 8년 동안 이스라엘은 46억달러 상당의 드론을 판매한 세계 최대 드론 수출국”이라고 보도했다.
최근 아랍권 위성방송 알자지라는 군사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험한 이스라엘의 파괴적인 ‘외과수술(처럼 정밀하다는)’ 살인 기계들을 전세계가 사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방송은 앞서 2014년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침공한 전쟁 당시 사례도 전했다. 가자지구 라파흐에서 택시운전사 나자르(당시 28살)가 승객 6명을 태우고 가던 중 이스라엘군의 스파이크 드론 미사일이 차량 지붕을 뚫고 들어왔다. 이 신형 무기는 지름 20m 사방에 3㎜ 크기의 자잘한 텅스텐 조각 수천개를 흩뿌릴 수 있다. 승객 모두 그 자리에서 신체가 심하게 훼손된 채 즉사했고, 나자르는 온몸에 열상과 중화상을 입고 간신히 목숨만 건졌다. 가자지구에서 일하는 노르웨이 출신 의사는 이 텅스텐 조각들이 폭발 범위 내 사람의 인체조직을 찢어내고 문자 그대로 너덜너덜하게 조각낼 수 있다고 말했다.
국제협약으로 금지된 무기가 실전에 쓰이는 경우도 흔하다. 이스라엘군은 가자 전쟁에서 살상 과정이 너무 끔찍해 ‘악마의 무기’로 불리는 백린탄을 공공연히 사용해왔다. 백린탄은 발화점(60℃)이 낮고 불이 붙으면 2700℃ 고열로 타는데, 인체에 달라붙으면 불이 꺼질 때까지 타들어가 희생자의 살과 뼈가 녹아내린다. 모탄이 폭발하면서 수천개의 자탄을 흩뿌리는 집속탄도 국제인도법이 금지하는 대량살상무기지만, 현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에서 양쪽 모두 집속탄을 사용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집속탄은 미국이 공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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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방산, 세계 8위 ‘수출 효자 품목’
세계적인 군비 증강 경쟁은 한반도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 8월 우리나라 정부는 2024년도 국방예산을 올해보다 4.5% 늘어난 59조5885억원으로 짠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한국의 국방예산은 2011년 처음으로 30조원을 넘어선 지 13년 만에 2배나 급증했다. 특히 내년 국방예산안은 2017년 이후 처음으로 정부의 총지출 증가율(2.8%)을 웃돈다. 우리 국방예산은 크게 군수 지원과 군 시설 운영을 포함한 ‘전력 유지비’와, 무기 획득 및 방위산업정책 지원을 포함한 ‘방위력 개선비’로 짜인다.
‘케이(K)-방산’으로 불리는 무기산업은 ‘수출 효자 품목’으로도 자리잡고 있다. 한국의 세계 무기 수출 시장 점유율은 2017년 12위에서 2021년 8위로 매년 한 단계씩 뛰어올랐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 이를 위한 튼튼한 국방과 안보는 모든 정부의 핵심적 의무다. 특히 국제 안보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방위력을 높이기 위한 군사비 증액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북한과의 대치 국면에서 평화 협력보다 압박과 대결에 무게를 싣는 것은 서로 군비 증강과 안보 위기의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올해 2월 윤석열 정부가 출범 뒤 첫 국방백서에서 “북한 정권과 북한군은 적”이라는 문구를 되살리고 한·미·일 삼각안보 체제를 강화한 이후 한반도의 안보 위기는 오히려 급격히 고조됐다.
특히 11월21일 북한이 군사 정찰위성을 발사하자 한국 정부는 다음날 9·19 남북군사합의의 일부 효력을 정지시켰다. 북한은 그다음 날 9·19 합의 전면 무효화 선언으로 맞섰다. 앞서 2018년 9월 남북한이 제3차 정상회담에서 군사적 긴장 완화를 위한 적대행위 전면 중지와 비행금지구역 설정 등에 합의했던 약속이 물거품이 됐다.
영국의 부패 감시 비영리단체 커럽션워치의 앤드루 파인스타인은 무기산업의 내막과 전쟁 기획자들을 다룬 저서 ‘어둠의 세계’(번역본은 2021년 오월의봄)에서 “무기산업은 ‘제품’이 파괴를 낳는다는 도덕적 문제 외에도 기회비용의 문제를 갖고 있다”고 짚었다. “불안정하고 위험한 오늘날 세계에서 무기 보유는 분명 필요하지만 (…) 사회와 개발에 필요한 자원이 대규모 군비 지출로 빠져나가고 이로 인해 다시 불안정이 심화”한다는 것이다. 그가 “성장과 고도화를 거듭하는 무기산업이 전쟁과 갈등을 부추기고 장기화”하며 “그 과도한 영향력으로 인해 각국 정부는 더욱 손쉽게 전쟁을 벌이게 된다”고 지적한 것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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