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뷰] 지식인의 비겁, 지식인의 죽음
하마스에 눈감은 좌파 비판
정의·평등 의미 오염시키는 건
전 세계 좌파의 공통점인가
역작 ‘사피엔스’로 뜨거운 학자가 된 유발 하라리의 이스라엘 자택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신간 ‘호모 데우스’가 막 나왔을 때다. 인터뷰 질문과 대답은 책의 주제였던 인류의 기원과 미래로 집중됐지만, 때로 그는 묻지 않은 얘기를 꺼냈다. 최장수 기록을 경신하던 네타냐후 총리에 대한 비판과 강경 보수화되고 있는 나라 걱정이었다. 자신의 국가에서 진행한 인터뷰이기 때문이었을까. 이스라엘 국내 문제였으므로 우리 지면에까지 실을 필요는 느끼지 못했지만, 영미권의 많은 지식인처럼 그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통치 방식에 비판적이었다.
아슬아슬한 휴전이 끝나고 공습이 재개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한복판에서, 그는 다른 의미의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하라리를 포함한 90명의 이스라엘 작가 예술가 학자들은 얼마 전 전 세계 좌파 지식인들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거칠게 압축하면 내로남불하지 말라는 것. 왜 당신들은 이스라엘은 비난하면서 하마스가 이스라엘의 어린이 노인 여성을 표적 학살한 행위에는 침묵하느냐는 반박이었다. 성명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평등, 자유, 정의, 복지를 옹호하는 좌파 인사들이 이토록 극단적인 도덕적 무감각과 정치적 무모함을 드러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하마스 공격 초기 하버드대 30여 학생단체의 “모든 폭력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이스라엘 정권에 있다” 운운, 또 미국 내 소위 민주사회주의자들의 “오늘의 사건은 이스라엘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직접적인 결과” 주장도 이 분노의 과녁이 됐다.
앞서 말했듯, 하라리 역시 이스라엘 정권에 비판적인 지식인이었다. 또 최근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내 팔레스타인 민간인 보복 공격도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모 앞에서 어린 자식을 살해하고 시신을 다시 훼손한 하마스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
지난 칼럼에서 한국 사회의 언어가 오염되고 있다고 쓴 적이 있다. 조국 윤미향 최강욱 등으로 대표되는 인물들의 맹활약 덕에, 평등과 정의와 공정이라는 아름다운 단어들이 조롱과 비아냥의 대상이 됐다는 한탄이었다. 위선과 내로남불은 전 세계 좌파로 번지는 팬데믹일까. 바다 건너 해외에서 발표된 이번 성명에도 그 언어의 오염은 예외 없는 조롱거리가 됐다. 평등과 자유와 정의와 복지를 그렇게 외치던 좌파들이 자신들이 ‘피의자’가 되자 꿀 먹은 듯 입을 닫는 몰염치.
21세기에 지식인은 죽었고 직업인만 남았다는 조롱이 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지식인이 필요하고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대중이 납작한 선악 이분법으로 세상을 볼 때, 지식인은 한 발자국 더 들어가야 할 의무가 있다. 지식인이 어느 한 편을 선택하는 건, 지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게으르다는 자백에 다름 아니다. 스탈린의 학살과 마오쩌둥의 숙청에 침묵하던 글로벌 좌파, 그리고 북한의 인권 탄압에 침묵하는 한국의 지식인도 마찬가지. 선택적 정의, 선택적 평등은 그 자체로 불의고 차별이다.
흔히 동화로 낮춰보지만,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현대문학의 걸작이다. 주인공 허클베리는 학교라고는 구경도 못 해본 무학(無學) 소년. 흑인 노예 짐을 ‘니거’라고 부르면서도 혐오 표현이라는 자의식조차 없다. 도망 노예를 돕는 것은 지옥에 가는 악한 행위라는 설교를 듣고 자랐지만, 지옥불을 무릅쓰고 친구가 된 짐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바친다. 그건 PC(정치적 올바름)도 아니고, 정의나 평등 의식 때문도 아니었다. 사람이라면 그래야 할 것 같은, 말 그대로 인간 본성의 발로. 번지르르한 말보다, 인간의 행동을 믿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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