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각 빅딜 안 되자 DJ 대로, 55개사 퇴출 명단 공개로 압박
손병두의 ‘IMF위기 파고를 넘어’ ② 빅딜 벼랑에 몰린 대기업
바로 다음날 김영삼(YS) 대통령이 APEC 참석차 밴쿠버에 왔다. YS와 대기업 회장단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다. 때가 때인지라 회장들은 “부족한 외화를 벌어 들여야 하니 수출금융을 늘려 달라” “금리·임금을 동결하는 긴급 조치를 해달라” “만기 도래하는 기업부채를 연기해주고 채무조정을 해달라”는 등의 건의사항을 내놓았다. 사전에 여러차례 발언 연습을 할 정도로 대기업 회장들의 위기감은 절실했다.
대통령의 답변을 들을 차례였다. YS는 “어이 비서, 서울에서 준비해 온 것 가져와”하더니 그대로 읽어 내려갔다. “경제가 어려운 만큼 기업인들이 합심해서 노력해 달라”는 지극히 원론적인 내용 뿐이었다. 기대감에 가득 찼던 회장들의 표정은 실망감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나 역시 대통령의 답변에서 경제위기에 대한 절박감을 읽을 수 없었다. 앞으로의 일이 큰 걱정으로 다가왔다. 그 날의 낭패감은 26년이 지난 지금도 나의 뇌리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대기업, 고도성장 영웅서 환란 원흉으로
12월 18일 구제금융 쇼크 속에 치러진 대선에서 김대중(DJ)후보가 승리했다. 후보 시절 재협상을 주장하며 IMF 지원을 요청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당선 이후 완전히 태도를 바꾸어 IMF 지원 조건에 충실히 따랐다. DJ는 12월 24일 국회 귀빈식당에서 최종현 전경련 회장을 비롯해 대한상공회의소, 한국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 경영자총협회 등 경제5단체장과 만났다. DJ는 대기업들에게 자율적 구조조정과 함께 조속한 기업혁신을 주문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제가 생기면 희생양을 찾게 마련이다. 대기업은 경제난국의 주범으로 낙인 찍혔다. 일단 ‘주범’으로 찍히니까 사방에서 돌팔매가 날아들었다. “2차 대전 후 맥아더 사령부가 일본 재벌을 해체했듯이 재벌을 해체하라” “그룹별로 주력 업종에만 집중해라” “기획조정실을 없애라”는 등등의 갖가지 주문과 비난이 쏟아졌다. 어제는 대한민국 고도성장의 영웅이었는데 오늘은 한국경제를 망친 원흉이 된 것이다.
이른바 빅딜(Big Deal)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이런 분위기를 타고서였다. 나는 처음부터 빅딜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큰 사업끼리 서로 교환한다는 의미로 쓰긴 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한국식 조어 즉 콩글리시였다. 빅딜을 하려면 기업의 평가문제, 즉 가격결정, 고용인원 처리, 각기 다른 기업문화의 수용, 법적문제 등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들이 많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기업 인수합병(M&A) 시장이 발달돼 있지 않아 기업가치 산정에 어려움이 컸다. 최종현 전경련 회장도 사석에서 “무슨 헛짚는 소리냐”고 하면서 부정적이었다. 정부에 의한 인위적 사업 교환보다는 시장경쟁에 맡겨 국제경쟁력을 갖도록 하는 것이 올바른 해법이라고 했다. 나는 정부 당국자나 언론을 만날 때 이런 말도 했다. “과잉투자 때문에 빅딜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국내만 보면 각 업종의 투자가 과잉인 게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시장을 놓고 보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 우리 경제는 수출 주도형 경제이기 때문이다.” “국내에 자동차, 조선, 반도체 등이 하나씩만 있다고 할 때 과연 국제 경쟁력이 있는지 의문이다. 업종 몰아주기는 자칫 독과점을 초래할 수 있다.” “구조조정기에 스스로의 핵심 역량을 정하는 것은 각 기업이 알아서 할 일이다. 구조조정에 전경련이 나서서 중재한다거나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무리다. 5공 시절의 부실기업 정리도 결국 실패하지 않았나.” 기자들에게는 “제발 빅딜이란 말 좀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 했다. 대신 ‘자율 구조조정’이라고 써 달라고 당부했다.
1998년 1월 22일 오전 7시 30분, 서울 명동 은행연합회 뱅커스 클럽으로 임창열 부총리가 5대 그룹 기조실장 회의를 소집했다. DJ 당선인의 재벌개혁에 대한 ‘지침’을 시달하기 위해서였다. 그 전날 DJ가 현대, LG, 삼성 그룹의 구조조정 개혁이 미흡하다며 임 부총리에게 “대기업 구조조정을 챙기라”고 지시해서 급히 소집된 것이라고 했다. 이 회의에서 김원길 국민회의 정책위의장은 “IMF 체제의 조기 극복을 위해서는 재벌의 업종 전문화를 통해 국제 경쟁력에서 이기는 길 밖에 없다. 가급적 대통령 취임 전에 빅딜 결과가 가시화할 수 있도록 해 달라. 빅딜 계획을 일주일 내에 제출해 달라”고 했다. 회의는 무겁게 끝났다. 5대 그룹 기조실장들은 낙제 점수를 받은 시험지를 들고 선생님 앞에서 야단맞는 모습이었다.
기업 자율구조조정 입장서 한발 후퇴
이야기는 거슬러 올라간다. DJ가 JP의 자민련과 연합할 때 내각제를 받아들이고 경제장관 임명권을 주며 경제운용의 책임을 지도록 했다. 그래서 박태준 총재가 경제운용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이른바 3각 빅딜 구상도 박태준 총재에게서 나왔다. 박 총재는 포철을 경북 포항의 허허벌판 모래사장에서 당시 세계 제3위의 철강회사로 일군 신화적 존재였다. 그는 철강 한가지 업종에 집중해서 성공했고, 박정희 대통령 후광으로 오너 같은 막강한 권한을 가졌지만 스스로 전문경영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기업 구조조정에서 ‘업종 전문화’와 ‘소유 경영의 분리’를 강하게 주문했다.
박 총재는 98년 1월 19일 황경로 포스코경영연구소(POSRI) 회장을 자신의 경제특보로 임명하고 M&A 전문가인 윤현수 코미트M&A 사장의 도움을 받아 3각 빅딜의 얼개를 짰다. 현대는 석유화학을 LG에 주고, LG는 반도체를 삼성에 주며, 삼성은 자동차를 현대에 준다는 내용이었다.
당선인 DJ의 의지는 대단히 강했다. 98년 6월 6일 미국 방문길에 오른 DJ에게 박 총재는 “미국 다녀오시는 동안에 다 해 놓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6월 10일 김중권 청와대 비서실장은 조선호텔에서 열린 한국능률협회 조찬 강연회에서 곧 빅딜 계획이 발표될 것이라는 ‘폭탄선언’을 했다. 그러나 막상 3각 빅딜을 추진한 박 총재는 11일 “전혀 알지 못한다”고 전면 부인했다. 같은 날 이규성 재정경제부장관도,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도, 박태영 산업자원부 장관도 모두 검토한 바 없다고 부인했다.
황경로 특보는 삼성·LG·현대를 돌아다니며 안을 제시하고 문서에 사인을 받고 했는데, 내가 아는 바로는 삼성과 현대가 끝내 사인을 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돌아온 DJ는 3각 빅딜 무산에 큰 실망과 함께 대로했다. DJ는 6월 17일 김우중 전경련 회장과 박상희 중소기업중앙회 회장 등 경제 단체장들을 청와대로 불렀다. 나도 그 자리에 참석했는데 DJ는 “잘 되는 줄 알고 미국 갔다왔는데 결과가 없어 안타깝다”면서도 빅딜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18일에는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이 55개사 퇴출 명단을 발표하며 빅딜 압박을 가했다. 퇴출회사 명단은 대외적으로 발표하지 않기로 나와 약속을 한 후 명단을 건네 준 것인데 덜컥 발표를 해버렸다. 각 사들이 M&A 시장에 매물을 내 놓고 흥정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흥정이 중단되고 가격을 형편없이 후려칠 우려가 현실화 한 것이다. 해당 회사들은 나에게 항의 전화를 쏟아냈다.
사태가 이렇게 급박하게 돌아가자 19일 전경련은 긴급 회장단 회의를 열어 “시장경제 원리와 기업 자율의 원칙 아래 국민경제와 당사자의 경쟁력 제고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사업 교환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종전엔 “정부 주도의 경제성 없는 빅딜 추진은 도움이 안 되는 것이며 기업 스스로가 서로 간에 도움이 되는 방향에서 하겠다”고 했는데 자율 구조조정 입장에서 한발 후퇴한 셈이다. 그 동안 전경련은 각 그룹 간 구조조정 업무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는데 이제 어쩔 수 없이 정부와 기업 간의 교량 역할을 맡게 되었다. 〈계속〉
손병두. 동서투자자문 사장과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등 경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서강대 총장, KBS 이사장, 호암재단 이사장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다채로운 활동을 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전경련 상근부회장으로서 정부와 재계의 입장을 절충하며 ‘빅딜’과 구조조정을 조율하는 역할을 했다. 현재 경제채널 ‘CNBC’의 한국 파트너사인 CNBCKOREA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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