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한 당신 떠나라, 작곡가 로시니 37세에 펜 놓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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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누구나 언젠가는 은퇴를 한다. 예술가도 마찬가지다. 가장 좋은 것은 인기의 절정에서 박수를 받으며 떠나는 것이다. 영원히 지속되는 성공은 없으니까. 그러나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 유독 작곡가들에게는 은퇴가 없다. 육체는 쇠약해져도 창작욕은 줄어들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서 작곡가들은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펜을 놓지 않는다. 유독 이들에게 미완성 작품이나 유작이 많은 이유이다. 그래서 당대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로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조아키노 로시니가 37세의 나이를 끝으로 오페라 작곡을 그만둔 것은 당시 모든 사람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는 여전히 너무 젊었고 그가 발표하는 작품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정부 연금 덕에 안정적인 삶
그 이듬해에 로시니는 처음으로 진지한 장르인 오페라 세리아에 도전했고 비극적인 결말을 갖는 ‘탄크레디’를 만들어 보란 듯이 성공시켰다. 탄탄하고 진지한 작품 속에서도 그의 독창성은 유감없이 빛났다. 그는 희극과 비극의 특징들을 하나의 작품 속에 완벽하게 녹여냄으로써 오페라 역사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다양하고 흥미로운 인물들을 만들어 냈다. 그가 만든 인물들은 누구나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현실적인 캐릭터라 더욱 호소력이 있었다. 로시니의 명성은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 유럽 대륙과 미국에까지 퍼져 나갔으며, 불과 23살의 나이에 그는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의 음악 감독이 되었다.
운도 실력이라고 했던가. 그는 운도 좋았다. 로시니의 최고 인기 오페라인 ‘세비야의 이발사’는 초연할 당시만 해도 곧 사장될 운명에 놓였었다. 이 오페라는 프랑스 극작가 피에르 보마르셰의 3부작 희곡을 바탕으로 하는데, 모차르트가 희곡의 첫 번째 부분을 사용해서 ‘피가로의 결혼’을 작곡했을 뿐 아니라, 나폴레옹이 가장 사랑한 작곡가 파이시엘로가 두 번째 부분을 기초로 만든 ‘세비야의 이발사’가 이미 존재했기 때문이다. 결국 로시니의 오페라는 주인공의 이름인 ‘알마비바’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올려졌고, 설상가상으로 파이시엘로 추종자들의 야유로 초연은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공교롭게 파이시엘로가 바로 사망하는 바람에 로시니 오페라가 ‘세비야의 이발사’라는 제목으로 다시 무대에 올라갈 수 있었고, 그 이후 ‘세비야의 이발사’는 오롯이 로시니의 것이 되었다.
그의 전성기였던 1820년대 유럽인들에게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작곡가가 누구냐고 물었다면 대부분 베토벤이 아니라 로시니라고 답했을 것이다. 당시 50이 넘었던 베토벤도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22년 로시니가 자기가 사는 빈을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군중들의 히스테리에 가까운 ‘로시니 열병’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빈과 런던에서 화려한 시즌을 보낸 이후 로시니는 파리에 정착했고, 처음에는 이탈리아어 코믹 오페라를 쓰고 그 다음에는 프랑스어 코믹 오페라를 쓰더니, 급기야 최초의 프랑스어로 된 진지한 오페라 ‘기욤 텔’을 내놓아 세상을 다시 놀라게 했다. 일부 가수들이 연주를 피할 정도로 어려운 데다 상연시간만 3시간 45분이나 되는 대작이었다. 이 새로운 오페라는 엄청난 인기를 얻어 그의 생전에만 500회가 넘게 상연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기욤 텔’이 그의 마지막 오페라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작권이 없던 시절 자신의 작품을 무대에 올려야만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작곡가들에게 죽기 전까지 은퇴란 없었으니까.
말년에 레종도뇌르 기사 훈장 받아
몇 년간 이탈리아로 가서 볼로냐 음악원의 교장으로 지내는 동안 로시니가 양극성 정동장애를 앓았으며 임질에 걸렸고 이후 그 후유증으로 고생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다시 파리로 돌아온 후 그의 건강은 빠르게 회복되었고, 평소 좋아하던 요리 연구에 몰두하여 요리책을 출판하는 등 이전보다 더 행복하고 유쾌한 만년을 보냈다. 로시니는 파리 중심지에 아파트를, 그리고 파리 외곽에 고풍스러운 빌라를 갖고 있었는데, 여름에는 빌라에서 겨울에는 파리의 아파트에서 ‘토요일 저녁’이라는 살롱을 10년 이상 개최했다.
프랑스를 넘어 해외에서도 유명했던 그의 살롱에는 당대 최고 성악가들은 물론 사라사테와 요아힘 같은 비루투오소 바이올리니스트가 단골로 초청되었을 뿐 아니라 구노, 리스트, 루빈스타인, 마이어베어, 베르디가 초대되어 연주를 했다. 로시니는 자신을 겸허하게 4급 피아니스트라고 말하곤 했으나 살롱에서 직접 연주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의 연주 실력은 실제로는 유명 피아니스트들조차 매료시킬 정도로 훌륭했다고 한다. 로시니는 이 살롱을 위해서 필요한 가곡, 피아노 독주곡, 실내악 등의 소품들을 직접 작곡하기도 했다.
그에게 은퇴 후의 인생은 축복이었고 그래서 여생이 즐거울수록 더욱 겸손하고 감사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살롱에서 연주하기 위해 150개도 넘는 곡을 만들었는데 이 작품들을 스스로 ‘노년의 죄’라고 낮추어 불렀다. 1864년에 작곡한 ‘작은 장엄미사’에 그가 직접 적어 넣은 기도는 더욱 겸손하다. “사랑의 하나님, 여기 이 보잘것없는 작은 미사를 끝냈습니다. 제가 쓴 이것은 성스러운 음악인가요, 아니면 저주받은 음악인가요. 당신도 잘 아시듯 저는 광대 오페라를 위해 태어났습니다. 약간의 재주, 약간의 진심 그게 저의 전부였습니다. 부디 저를 축복해주시고, 제게 천국을 내리소서.” 은퇴 이후 수십 년간 이렇다 할 업적이 없었지만 말년의 로시니는 나폴레옹 3세로부터 프랑스 최고 영예인 레종도뇌르 기사 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1868년 짧은 투병 기간 이후 76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는데, 성 삼위일체 교회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4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마지막 길을 함께했다.
그의 빠른 은퇴는 로시니의 음악을 사랑했던 사람들에게는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은퇴하지 않았다면 이전보다 더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 내지 않았을까. 은퇴 후에도 40년을 더 살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좋아하는 요리에 전념해서 책도 썼고 새로운 여성과 결혼도 했고 문화계 셀럽들이 모이는 살롱의 주인이 되었으니까. 은퇴 후에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하다가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어디 흔한가. 인생을 겸손하게 낙천적으로 살았던 로시니에게 주어진 축복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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