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 경기 즐기기보다 미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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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오디세이] ‘검을 든 철학자’ 펜싱 대표 구본길
구본길(34)은 ‘어펜저스(펜싱+어벤저스)’의 에이스다. 어펜저스는 세계 최강인 대한민국 남자 펜싱 사브르 대표팀의 별칭이다. 구본길과 김정환·오상욱·김준호로 구성된 어펜저스는 2020 도쿄 올림픽 단체전 금메달을 따냈고, 올해 9월 항저우 아시안게임도 석권했다. 항저우 개인전 결승에서는 구본길이 오상욱에 7-15로 져 아시안게임 통산 최다 금메달(7개) 기록을 세우지는 못했다.
Q : ‘광저우 대회를 통해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했는데요.
A : “아시안게임 가기 전에 최다 금메달, 아시안게임 4연패 등에 대한 압박이 심했어요. 긴장감 때문에 도망가고 싶고, 차라리 개인전을 안 뛰었으면 싶었죠. 8강에서 거의 진 경기를 이겼고, 맞은편에서 (오)상욱이가 올라왔어요. 결승이 끝나는 순간 정말 후련하더라고요. 딱 끝나고 나서 느낀 게 ‘난 정말 펜싱을 좋아하는구나’였어요. 펜싱에 대한 초심, 첫사랑, 간절함을 다시 찾은 대회였습니다.”
올림픽 금 2, 아시안게임 6개 따내
Q :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한 게 오늘의 구본길을 만들었다고 했는데요.
A : “제가 말하는 ‘왜’는 무조건 ‘긍정적인 왜’입니다. 코치나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게 아니라 자신한테 물어보는 거죠. 사람들은 시키는 대로 하잖아요. 저는 더 디테일하게 이 동작을 내가 왜 해왔는지 어느 상황에서 해야 되는지 저한테 계속 질문해요. 부정적으로 ‘아니 이걸 왜 해야 돼?’가 아니죠. 주입식 교육이 문제라고 하는데, 누가 주입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남이 주입하느냐, 내가 주입하느냐. 대부분 남이 주입하는 걸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저는 제 방식으로 필터링을 한 거죠.”
Q : ‘왜’라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타협하면 요행수·무리수가 나오고 부상으로 이어진다고 하셨죠.
A : “펜싱을 25년 했는데 몸의 감각은 정직해서 훈련을 안 하면 떨어지게 돼 있어요. 운동이 하기 싫으면 ‘이 정도면 돼’ 라며 타협을 하죠. 그러면 감각이 떨어지면서 무리수를 두게 됩니다. 내 전술로 하는 게 아니라 ‘통밥’을 굴리거나 상대 실수를 기대하죠. 상대가 실수를 해도 그걸 받아먹는 과정에서 동작에 무리가 가게 됩니다.”
Q : ‘나의 마르셰는 끝나지 않았다’는 칼럼의 표현이 아주 멋진데요.
A : “마르셰(marche)는 펜싱의 가장 기본적인 전진 스텝을 말합니다. 펜싱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마르셰를 몇 번 했을까요? 100만 번도 더 했겠죠. 후배들이 ‘형 이제 얼마 안 남았다. 마르셰 몇 번 더 하겠노’ 농담을 합니다. 근데 생각해 보니까 선수로서 마르셰는 끝나겠지만 저는 지도자든, 행정가든 대한민국 펜싱의 발전을 위해 멈추지 않을 겁니다. 방향만 다를 뿐이지 제 인생의 마르셰는 죽을 때까지 계속 간다는 거죠.”
A : “톱에 있는 선수들의 공통적인 고민이 은퇴 시기죠. ‘박수 칠 때 떠나라’는 쉬운 게 아니에요. 왜 박수 칠 때 떠납니까. 더 해야죠. 문제는 후배에게 뭘 물려줄 거냐 하는 거죠. 펜싱의 기술이나 동작은 사람마다 몸도 타이밍도 달라서 물려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것보다는 운동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를 보여주고 싶어요. 연습 시작 30분 전에 미리 와서 신발끈을 묶는 모습, 이런 솔선수범을 보여주는 게 선배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Q : 어머님의 큰 가르침은 무엇이었나요.
A : “어머니는 티를 잘 안 내세요. 힘든 것 아픈 걸 꿋꿋이 버티고 있는 모습을 자주 봤거든요. 저도 ‘난 이걸 해내야 한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고 다짐했어요. 지면서 배우는 게 있다는 말은 저한테는 사치였어요. 지면 끝나는 거였으니까. 그 절박함이 제 성장의 동력이었죠.”
Q : ‘경기를 즐겨라’는 말도 많이 하잖아요.
A : “저는 후배들한테 ‘연습게임에서도 이기는 습관을 들이라’고 합니다. 동작을 익히는 연습에서도 자꾸 찔리면 습관이 돼 버려요. 상대 칼에 찔리는 감각에 익숙해지면 힘든 상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멘탈을 놓아버리게 됩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기는 습관을 들이고, 그 다음에 즐기라고 말하고 싶어요.”
Q : 쉽지 않은 주문 같은데요.
A : “저는 ‘즐겨라’보다는 ‘미쳐라’가 맞는 것 같아요. 미치면 힘든 것도 몰라요.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고 거기서 결과가 나왔을 때 그게 진짜 즐기는 거죠. ‘훈련 많이 했잖아. 하던 대로 하면서 즐겨’ 이건 아니죠. 그러면 고비를 못 넘겨요. 미치다 보면 ‘야, 이거 내가 어떻게 이겼지?’ 할 정도로 게임 내용이 하나도 생각 안 나요. 지면? 한 포인트 한 포인트 다 생각이 납니다.”
Q : 자식의 큰 경기 앞두고 어머님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108배를 하셨는데요. 힘들 때 의지하는 대상이 있나요.
A : “저희 집안은 불교인데, 운동 하면서 기독교에 빠져 있는 형들도 많이 봤어요. 물론 힘들면 부처님이든 하나님이든 다 도움을 받고 싶죠. 하지만 저는 제 몸을 믿습니다. ‘가족들 건강하게 해 주세요’ 같은 소원은 빌 수 있어요. 그런데 몸을 움직여서 결과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경기에선 누구도 날 대신해 줄 수 없어요. 자칫 잘못하면 신앙이 ‘핑계’가 될 수 있습니다.”
펜싱의 매력이 뭔지 물었다. 그는 “몸으로 두는 장기나 바둑, 또는 가위바위보 같은 것”이라고 했다. “1대 1로 붙으면 이 안에 무한한 수(手)들이 있죠. 몸으로 수싸움을 하니까 몸도 준비돼야 하고, 머리도 써야 합니다. 이게 맞아떨어져서 상대를 찔렀을 때 쾌감은 정말 짜릿하죠. 펜싱은 ‘칼을 들고 하는 카드 게임’이라고 정의하고 싶네요.”
이긴 경기는 점수 딴 기억도 안 나
Q : 취미로 펜싱을 하는 분들이 늘었는데요.
A : “펜싱은 유산소와 근력 운동을 함께 할 수 있고, 운동량이 정말 많아요. 칼을 써서 위험해 보이지만 보호장구가 있어서 투기 종목 중 가장 안전합니다. 펜싱은 ‘내가 졌다’고 먼저 인정하기 때문에 승복하는 자세와 품격을 수련할 수 있는 좋은 운동이기도 하고요.”
Q : 해외 대학 입학 스펙 쌓기로 자녀를 고액 펜싱 클럽에 넣는 경우가 많다던데요.
A : “펜싱 클럽 하시는 분들이 싫어하실지 모르겠는데요(웃음), 솔직히 펜싱이 아이비리그 가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는 건 아닙니다. 일단 공부를 잘해야 하고, 실력이 비슷하다면 펜싱 대회 입상한 게 어드밴티지가 될 수는 있겠죠.”
Q : 펜싱 레전드 출신 남현희씨가 얽힌 대형 스캔들이 터졌는데요.
A : “펜싱이 올림픽·아시안게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인기도 올라가는 중에 터진 일이라 안타까워요. 더 속상한 건 모든 국민이 스포츠인을 다 그렇게 보지 않을까 하는 점이죠. 절대 다수의 스포츠 선수들이 운동뿐만 아니라 사회생활도 멋지고 모범적으로 하려고 애쓰고 있거든요.”
Q : 패션 센스가 남다르신데요.
A : “와이프가 옷과 패션에 관심이 많아서 저를 많이 꾸며주거든요. ‘이거 입어봐’ 하는데 제 스타일이 아닌 경우가 있어요. 그래도 입고 나가면 사람들이 ‘잘 어울린다’ ‘요즘 유행 좀 아네’ 하는 겁니다. 와이프를 믿은 덕분에 기본은 갖춘 것 같습니다.”
Q : 말씀도 잘하시고 스타일도 좋아서 은퇴하면 방송 쪽에서 끌어가려고 할 것 같은데요.
A : “저는 은퇴 후에도 펜싱 쪽 일은 계속 할 겁니다. 방송을 한다면 펜싱을 알리는 차원 정도겠죠. 펜싱 동호인대회 우승자가 갑자기 선수촌에 와서 게임을 뛰었다고 합시다. 우리는 신기해서 ‘와, 잘하시네요’ 했더니 ‘저는 국가대표가 될 겁니다’ 이러면 어떨까요. ‘방송 잘한다’ 소리 들으면 그런 느낌이 듭니다. 이건 내 자리가 아니구나. 하하.”
■ 구본길
「 소속 국민체육진흥공단
출생 1989년 , 대구광역시
체격 182㎝, 70㎏
올림픽 금메달 2012 런던, 2020 도쿄
아시안게임 금 6 (역대 한국선수 공동 1위)
상훈 체육훈장 청룡장
」
정영재 문화스포츠 에디터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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