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 무역 구조가 완성시킨 ‘작물의 사슬’

김수미 2023. 12. 1.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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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사탕수수 등 열대 작물들
전세계 소비자들 탐닉 몸값 상승
플랜테이션 경작 대표적인 형태
값싼 노동력 착취는 옛 노예 연상
지구 반대편서 재배 기호식품들
원주민들에겐 비극의 씨앗 전락
“정당한 몫으로 비극 고리 끊어야”

기호와 탐닉의 음식으로 본 지리 : 축복받은 자연은 어떻게 저주의 역사가 되었는가/조철기/따비/2만5000원

지금은 가장 흔한 과일 중 하나인 바나나는 1970∼1980년대만 해도 비싸고 귀했다. 바나나가 대중적인 과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다국적 기업들이 대규모 플랜테이션으로 바나나를 대량 생산한 덕분이다.

바나나는 주로 라틴아메리카 여러 국가와 필리핀, 인도네시아에서 재배되는데 농장은 대부분 치키타, 돌, 델몬트 등 미국의 다국적 기업이 소유하고 있다. 미국이 단 한 개의 바나나도 생산하지 않으면서 바나나 수출로 가장 많은 돈을 버는 나라가 된 이유다. 바나나 가격의 20%만 바나나를 생산하는 국가로 돌아가며 재배와 수확, 세척, 분류, 포장을 하는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몫은 3%에 불과하다. 또 가장 독성 강한 농약을 경비행기를 이용해 5일에 한 번씩 경비행기로 공중에서 뿌린 탓에 노동자들은 피부암, 불임 등 각종 질병에 시달린다.
살충제와 방부제로 범벅이 된 바나나의 세척과 포장은 대개 여성들의 일이다. 따비 제공
신간 ‘기호와 탐닉의 음식으로 본 지리’(따비)는 바나나를 비롯해 차(茶)나무와 사탕수수, 카카오, 기름야자 등 전 세계 소비자들이 탐닉하는 열대 및 아열대 작물의 상품 사슬을 통해 축복받은 자연이 저주의 역사로 바뀌는 과정을 추적한다.
플랜테이션은 16∼17세기 열대 및 아열대 지역에 식민지를 개척한 유럽 국가들이 현지 원주민의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본국의 자본과 기술을 도입해 상품 및 기호 작물을 단일 경작하는 기업적인 농업 경영 방식이다.
조철기/따비/2만5000원
설탕 원료인 사탕수수는 대표적인 플랜테이션 작물로, 유럽인들이 대서양 노예무역의 중심지인 카리브 해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한 후 설탕으로 가공해 유럽에 팔았다. 설탕 수요가 급증해 원주민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아메리카 대륙으로 데려왔다.

노예무역선을 타고 열악한 환경 속에 3∼4개월간 항해하면서 노예들은 질병과 학대, 자살, 폭동으로 45.8%가 사망해 대서양으로 버려졌다고 한다. 무사히 신대륙에 도착한 노예들도 혹독한 노동을 강요당하며 가축 취급을 받다가 평균 30세에 사망했다.

식민 통치가 끝나고 노예가 사라진 지 오래지만,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현재 차르니코우, 석덴 등 6개 회사가 전 세계 설탕 무역의 3분의 2를 차지하며 천문학적 이익을 올리는 반면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사탕수수 재배 농민 대부분은 하루에 2달러 이하로 살거나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수출을 위해 사탕수수 재배면적을 늘리면서 주식인 옥수수 생산량이 줄고 가격이 비싸져 농민들이 사먹을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설탕은 우리 삶을 달콤하고 풍요롭게 했지만 그 달콤함 뒤에는 씁쓸함이 숨어 있다.
1880년경 아프리카에서 끌려와 자메이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던 노예들. 따비 제공
‘자연이 준 신의 음료’라 불리던 카카오 역시 가난한 식민지 노예들의 희생을 통해 부유한 유럽 사람들이 마시는 악마의 음료가 됐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사탕수수와 마찬가지로 카카오 역시 아프리카 노예를 데려와 아메리카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재배한 후 유럽으로 수출하는 삼각무역에 의존했다. 18세기 중반 이후 카카오나무에 병충해가 발생하고 라틴아메리카의 플랜테이션만으로는 급증하는 카카오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자 초콜릿 기업들은 카카오나무를 서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의 열대 지역에 옮겨 심었다.
말리, 가봉, 나이지리아 등의 어린이들은 15달러에 카카오 농장에 팔려와 강제노동에 시달린다. 따비 제공
비극의 씨앗이었다. 국제앰네스티에 따르면 30만명이 넘는 어린이들이 가나, 기니, 나이지리아, 시레라리온, 카메룬, 코트디부아르 등 서아프리카의 카카오 농장에서 일하고 있다. 이들 상당수는 인신매매꾼이 가난한 부모에게서 15달러를 주고 데려와 농장에 넘긴 아이들이다. 하루도 쉬지 못하고, 하루 두 끼만 먹으며 열 시간 이상의 고된 노동을 강요당한 아이들은 학교 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이처럼 우리가 지구 반대편에서 재배되는 기호식품들을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것은 단지 기술과 교통 발달 덕분이 아니라 열대 및 아열대의 축복받은 땅에서 노동 착취를 당한 원주민들의 희생 때문이다. 이런 비극의 고리를 끊기 위해 시작된 것이 제3세계 생산자들에게 정당한 몫을 지불하는 공정무역 운동이다. “바나나 한 개, 차 한 잔, 초콜릿 한 조각처럼 아주 사소한 것들이 우리의 삶과 그들의 삶을 바꿀 수 있다.”

김수미 선임기자 leol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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