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짜로 돌릴 수 있는 기계 아니에요"

김성희 <한겨레> 6411의 목소리 편집자문위원 2023. 12. 1.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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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6411] 일과 사랑의 시인

<작은책>과 노회찬재단이 기획한 '시인의 시선으로 6411 투명인간을 바라보다'는 노동 현실에 발 딛고 있는 시인들이 <한겨레>에 연재 중인 '6411의 목소리' 한 편을 읽고 대화를 나누는 자리다. 9월부터 11월까지 매월 마지막 주 월요일에 세 차례 진행된다. <프레시안>에서는 이를 세 차례에 걸쳐 올릴 예정이다. 편집자

일상이 편치 않다. 무엇을 하든 희미한 죄책감이 느껴진다. ‘시인의 시선으로 6411 투명인간을 바라보다’ 두 번째 대화가 열린 날도 뉴스는 폭격당하는 팔레스타인 영상을 내보냈다. 벌써 아이들만 4000명 넘게 죽었다. 시인과의 대화는 노지영 문학평론가의 사회로 ‘MZ 리얼리스트 시인’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최지인 시인과 함께 진행됐다.

노지영 : 사회과학자들 의견 듣기도 바쁜데 시인에게 무슨 이야기를 듣나 싶을 수 있는데, 시는 사회과학적 진술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감정을 환기해 주는 장르잖아요? 환경은 사람이 만들어 가는 것이고 마음을 다루는 시인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MZ세대 리얼리스트 최지인 시인과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최지인 : 초대 감사합니다. 저는 파주 문발동에 있는 협동조합 ‘쩜오책방’ 책방지기, 마을 시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마을 사람들끼리 만드는 계간지 <디어교하> 기자단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최지인 시인은 먼저 '6411의 목소리' 중에서 베트남에서 온 부티탄화 님이 쓴 칼럼 '나 메이드인 베트남이 아니에요. 사람이에요.'를 읽었다. 한국에 오기 전 베트남에서 겪은 노동. 돈 벌러 한국에 오려고 선택한 결혼 이주. 낮에는 깻잎 비닐하우스에서 일하고 밤에는 이주 여성들 도우며 사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는 "나 메이드인 베트남 아니에요. 나는 나예요. 공짜로 돌릴 수 있는 기계 아니에요. 사고 싶은 게 있고 먹고 싶은 게 있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어요." 이렇게 맺고 있다. 이어서 시인은 자신의 신작 시 '하목과 샤홉'을 낭독했다.

▲최지인 시인이 자신의 신작 시 '하목과 샤홉'을 낭독했다. ⓒ김성희

하목과 샤홉

다리는 일 년 내내 공사 중이고

멀리멀리 돌아
하천을 건넜다

너는 네가 자란 마을이 얼마나 작은지
천변에서
옆집과 그 옆집,
그 옆집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얼마나 먼 곳으로
먼먼 곳으로 떠났는지 말해주었다

네가 살던 마을은 이제 없고
어린 너도 우물에 빠져 죽었다

(중략)

가난한 자는 왜 먼저 죽는가 당신은 어디서 태어났는가
넘자 넘자 그 고개
어서 넘자

너는 너무 자책하는 경향이 있어
네 삶을 희생양 삼아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거야?

한 가족이 서로 손잡고 강을 건넌다 인간의 몸이 어둠 속에 잠
긴다
어둠의 속도
어린아이가 작은 인간의 어깨에 올라타 있다

어머니가
어머니의 어머니보다
나이를 먹고
종일 텔레비전을 틀어놓은 채
누워
중얼중얼
여기가 천국이고 여기가 지옥이네
독백할 때
어머니의 삶을 훔친 자가 나라는 걸 알았다

내가 자란 마을은 이제 없고

다리는 일 년 내내 공사 중이고

노지영 : 감사합니다. 시가 점점 길어지는 건 짧게 압축해서 말하기 어려운 현실 영향도 있겠죠. 어떤 마음으로 쓰셨는지요?

최지인 : 대학원에서 현대 문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학교에 외국인 학생들이 더 많아요. 하목은 박사과정 중국인, 샤홉은 우즈베크 친구예요. 국적은 다르지만 우리는 같은 현실에 살고 있어요. 세계에 정말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시인은 이 대목에서 말을 잇지 못하고 한동안 흐느꼈다.

노지영 : 남자가 울 때 어떻게 해 줘야 하나요? 시인은 슬퍼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것 같습니다. 불가해한 어떤 고통들을 언어로 말한다는 게 힘겨워 말을 잇지 못하는 것 같은데요….

최지인 : 글 쓰는 사람으로서 무력감을 느낍니다. 낭독한 시에서 ‘넘자 넘자 그 고개 어서 넘자’라는 구절은 아리랑에서 따왔습니다. 이 부조리한 세계를 아리랑 노래를 부르면서 넘어가자는 바람으로….

노지영 : 최지인 시인을 비정규직 청년세대의 리얼리스트 시인이라고들 하는데, 부담스러운 호칭이죠?

최지인 : 엄청 부담스럽습니다. 저는 운 좋게도 비교적 좋은 환경에서 일했고, 시라는 무기가 있었기에 여기 기대어 노동을 하면서 언제든 그 직업을 잃어도 괜찮은 상태였어요. 비정규, 리얼리스트 같은 수식은 제가 아니라 6411의 목소리 시리즈에 나온 분들에게 붙어야죠. 저 같은 시쟁이는 그냥 울보 정도….

노지영 : 이렇게 말하지만 최지인 시인의 행보, 문학적 성취에 대한 평단의 관심은 어마어마합니다. 문단에는 어느 순간 민중 시인이라는 말을 모욕으로 여기는 이상한 분위기가 있어요. 최 시인에게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면서도 민중문학을 자처해야 하는 딜레마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거시적인 문제, 보편적 아픔을 잘 전달해 왔어요. 이 시에서 가장 힘주어 읽은 구절이 어떤 부분인가요?

최지인 : ‘어머니의 삶을 훔친 자가 나라는 걸 알았다’ 이 구절입니다. 문득 어머니에게도 꿈이 있었고, 나를 기르며 그 꿈을 포기한 게 아닐까 그럼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런데 사실 제대로 해내는 일보다 엉망인 게 많거든요.

노지영 : 어머니의 삶을 훔치지 않고 산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요? 시 제목에서부터 ‘하목’과 ‘샤홉’이라는 낯선 이국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시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참혹한 전쟁과 어떻게 닿아 있나요?

최지인 : 우리는 비교적 안전한 한국에서 살지만 전쟁을 겪는 사람들과 연결돼 있고 전쟁은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다이소 같은 데 초저가 물건이 많은데 10년 전에도 천 원이었고 지금도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만든 사람들이 초저임금을 받겠죠. 사람만 계속 교체되고…. 조금 과장하면 우리가 모두 공범으로 노동착취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요.

노지영 : 그러면 시가 그런 세계와 어떻게 접속할 수 있을까요?

최지인 : 시 한 줄이 총칼 앞에서 한 사람도 살리지 못해도 그 죽음을 기록하고 기억할 수 있게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노지영 : 오늘 '6411의 목소리' 가운데 부티탄화 님 글을 고른 이유가 있을까요?

최지인 : 가장 울림을 준 글이었어요. 저는 목소리에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몸을 거쳐서 나오니까 우리의 감정과 어떤 기억들이 묻어나는데 이 글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느낌이었습니다.

노지영 : 시는 1인칭 화자의 자기 고백인데 부티탄화 님의 자기 고백적인 발언은 산문이면서도 강렬한 정서가 묻어나는 이야기라 저도 시를 읽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최지인 : 저는 언어로 기록된 것보다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시가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부티탄화 님 목소리에 비하면 제 시는 아주 작아요. 할 수 있다면 저는 시에 여러 겹의 이야기를 쌓아서 여러 화자의 다양한 목소리로 이 세계를 좀 다각적으로 보여 주고 싶습니다.

노지영 : 저는 '시는 수만 개의 각을 가진 보석과 같다'라는 말을 참 좋아해요. 최지인 시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더 많은 각도를 보여 주는 게 또 우리들 몫이겠구나 생각합니다.

첫 시집 <나는 벽에 붙어 잤다>, 독자들에게 많이 사랑받은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등 두 권의 시집에서 시인은 '비정규', '컨베이어' 두 편을 낭송한 뒤 <당신의 죄는 내가 아닙니까>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갔다.

노지영 : 함께 읽은 두 편을 보면 세 번째 시집으로 가는 방향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시의 화자들이 가족공동체 이야기로부터 타자에 대한 감각이 점점 열리고 있다고 느껴져요. 이렇게 착하고 순하고 여리지만 또 지극히 예민한 노동문학이 존재할 수 있구나 싶습니다.

최지인 : 시집을 낼 때마다 단순 반복이 아닌 이전 시들과 다르게 쓰려고 고민합니다. 세 번째 시집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전쟁으로 물류비가 상승했고 금리가 치솟아 민중들의 삶이 어려워졌죠. 우리나라에서는 이태원 참사가 벌어졌는데 비극적인 죽음 앞에서 우리가 충분히 울 시간이 있었나? 그런 마음들이 시집을 내게 한 게 아닐까 생각해요.

ⓒ김성희

노지영 : 공감합니다. 사건을 사고로 축소하고 끊임없이 언어를 훼손하면서 관제 애도를 하고 ‘이제 땡이다. 그만 슬퍼해라!’ 이런 현실에 숨통이 막히는 시인들이 많습니다. 편집자로 근무하다 프리랜서로 살고 계신데…, 투명인간 불안정 노동인 면이 있나요?

최지인 :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를 쓰는 것은 상품을 생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에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있고 그것이 느리지만 세상을 조금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변화까지는 아니어도 이 시대를 기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투명인간은 저보다는 목소리조차 낼 수 없는 사람들이 그렇죠.

노지영 : <당신의 죄는 내가 아닙니까>는 올 6월에 나왔는데. 제목이 뜨끔해요. 각 시들이 모여 있다기보다 그냥 책 한 권이 툭 덩어리로서 던져졌다는 느낌입니다. 글머리에 1965년 6월 22일 진도에서 채록한 민요가 실려 있는데 한일협정이 맺어진 날이기도 하더라고요. 어떤 의도인가요?

최지인 : 진도에서 채록한 날짜는 가상입니다. 1965년 한일협정은 미국과 영국이 주도해 일본의 전쟁 책임을 묻는 샌프란시스코 회의, 피해 당사국인 조선과 중국, 러시아 없는 상태에서 진행됐고 이 체제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데, 한일협정은 이게 표면화된 거죠. 이걸 문학적으로 표현하려고 보르헤스를 좀 따라 한 거죠.

노지영 : 마술적 리얼리즘?

최지인 :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모든 일에 연루되어 있고 나의 존재는 누군가의 죄가 될 수 있죠. 선인도 악인도 없고 시스템이 있고 체제가 바뀌지 않으면 끊을 수 없다는 생각을 나타내고 싶었습니다. 한 사람을 끌어내린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걸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잖아요. 과거의 인식이 사라졌다고 안심하면 어느 순간 다시 나타납니다. 저는 시인으로서 이 시대의 조각을 시 안에 박제함으로써 현재의 시간뿐 아니라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과 연결되는 순간들을 중첩적으로 보여 주려고 합니다.

노지영 : 이전 시집보다 사회적인 발언과 어휘들도 더 강렬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회적인 목소리를 시에 담을 때 좀 고민이 많을 것 같습니다.

최지인 : 실제로 현실은 시적이지 않은데 어떻게 시로 읽히게 할까 고민합니다. 저에게 시를 쓰는 것은 삶을 사는 일인데…. 말하고 들을 수 있는 자보다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생각합니다.

노지영 : 시집 중간에 그림 같은 것도 있고 표지 해설도 있어요. 독자들에게 좀 낯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최지인 : 제가 노지영 평론가, 김효진 작가와 함께 장애인문화 팟캐스트 <A의 모든 것>을 진행하고 있는데 첫 출연자가 시각장애인 송병걸 시인이었어요. 활동지원사가 타이핑해 주면 전자 음성으로 시를 들으시는데, 문득 내 시집을 보내 드려도 이분은 표지는 못 보시겠다 생각해 두 번째 시집부터 표지 설명을 간략하게 적었어요.

노지영 : 기존 형식을 계속 파괴하면서 새로운 모색을 하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곁에 있는데 그들이 ‘투명인간’으로서 노동을 많이 하고 있지 않나요?

최지인 : 예술은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과정들이 있는데 그 시간들은 무시되잖아요. 그 시간을 저는 ‘투명시간’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봅니다. 이것을 어떻게 수면 위로 끌어올릴 것인가가 과제입니다. 시인에게 살아 낸다는 것은 계속해서 써내는 것이고 산다는 것은 쓴다는 것인데, 살아 낸다는 것은 부끄러움을 견디는 것이기도 합니다. 제가 어떤 것을 쓰고 발표할 때 되게 부끄럽거든요.

노지영 : 저도 제 글을 많이 봐 줬으면 하는 욕망과 아무도 안 봤으면 하는 욕망이 같이 있죠.

최지인 : 황지우 시인이 한 ‘시의 형식을 파괴한다’는 말이 저는 현 체제를 파괴한다는 말로 들려요. 형식을 바꾸지 않으면 삶의 형식, 자본주의라는 체제의 부조리를 전복하는 새로운 지점으로 나아가기 어렵다고 생각해요. 지금 무슨 투사처럼 이야기하지만, 전 그저 울보일 뿐인데….

노지영 : 네. 최 시인에 대해 ‘살아 냄’, ‘일’,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많이 말하는데 최지인에게 일과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최지인 : 일하면서 우리는 휴가를 기다리고 더 나은 집, 더 나은 환경을 꿈꿔요. 일은 꿈을 꾸는 것. 사랑은, 조금 ‘딥’한 이야기일 수 있는데, 우리에게 삶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한 번씩 찾아오잖아요. 만약 이 절벽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면 죽음인데 사랑은 사람을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게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만약에 제 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없었다면 지금 이렇게 무사히 살아 있을 수 있을까.

*최지인 : 시인. 2013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 2022년 신동엽문학상 수상. 파주 문발동 주민들이 내는 마을 잡지 <디어교하> 편집위원. 시집 《나는 벽에 붙어 잤다》,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당신의 죄는 내가 아닙니까》를 냈다.

*노지영 : 문학평론가. 경희대 외래교수. 2010년 <시인>과 <내일을 여는 작가>로 평론 활동 시작.

[김성희 <한겨레> 6411의 목소리 편집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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