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 다니면 ‘진짜 가난’이 아닌가”[책과 삶]

임지선 기자 2023. 12. 1. 11:2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20년간 기초생활수급자였던 저자
‘나의 가난 이야기’ 담담히 드러내
여성 경력 단절·수급의 딜레마
가난 낳은 사회 시스템 꼬집어
서울 시내 임대아파트에서 한 할머니가 집으로 들어서고 있다. 강윤중 기자
일인칭 가난
안온 지음 |마티|168쪽|1만4000원

“방학식 끝나고 17번, 28번은 집에 가지 말고 교무실로 와서 우유 받아 가세요.”

‘나’는 28번이었다. 친구들이 교실과 운동장에서 다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질긴 비닐로 덮인 우유 팩 24개가 든 상자를 받아 주공아파트 언덕을 오른다. 방학 내내 상하지 않을 멸균 우유팩을 들고 가는 ‘나’는 짜증이 난다. 17번은 “그럼 나 줘. 우유가 많으면 할머니가 빈속에 약 드시는 날이 줄어들거든”이라고 한다. ‘나’는 그 아이가 가로채갈까봐 냉큼 우유를 안았다.

에세이 <일인칭 가난>의 저자, 올해 26세 안온이 기억하는 기초생활보장수급자로서의 첫 장면이다. <일인칭 가난>은 철저히 일인칭 관점에서 쓴 책이다. 20년간 국민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아온 저자가 자신의 ‘가난’을 썼다. ‘가난’을 그린 영화나 소설도 많고, ‘가난’을 양적·질적으로 연구한 논문도 많다. <일인칭 가난>에는 연구자의 시선이 아닌 ‘나의 가난 이야기’가 담겼다. ‘가난해서 힘들었다’는 신파가 아니다. 에세이는 감정을 배제한 채 가난의 편린들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엄마는 대중목욕탕에서 바지와 팬티를 한꺼번에 벗었다. 팬티에 난 구멍은 양말에 난 것과는 차원이 다른 부끄러움이니까. 그나마 속옷은 연기하기 쉬운 종목이었다. 나는 툭하면 가슴을 찌르는 브래지어 와이어와 사투하는 엄마에게 스타킹을 사달라고 말하지 못했다. 교복치마를 입은 나는 겨울 바람에 종아리가 군데군데 트고 빨개졌다.”

책은 가난의 전형성을 깨뜨리며 언제부턴가 한국 사회에서 조용히 가려진 ‘가난’ ‘빈곤’ 이야기를 들고와 정면 돌파한다. 저자는 프롤로그부터 목소리를 높인다. “부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그토록 많은 책을 쓰고 팔고 사는데, 가난이라고 못 팔아먹을까. 더 쓰이고 더 팔려야 할 것은 가난이다. 나의 가난이 과거형이 된다 해도 우리의 가난은 진행형이기에, 이 책은 일인칭으로 쓰였으나 일인분짜리는 아니다. 그런 마음으로 썼다.” 이 책이 짧지만 쉽지 않은 이유다.

혹자는 ‘비가 새는 베니아판 판잣집도 아니고, 임대아파트에서 하루 세 끼 밥 먹을 수 있었으면 가난한 것도 아니네’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학원이다. 어머니는 기초생활수급으로 나오는 돈을 생활비로 쓰고 나머지 번 돈으로 ‘나’를 학원에 보냈다. 저자는 영어가 정식 과목이 되는 초3부터 ‘윤선생 영어교실’을 다녔다. “책을 사거나 학원에 다니면 진짜 ‘가난’한 것은 아니라고 따지는 사람이 있을 것을 안다. 내가 엄마의 삯과 몸과 시간을 먹어 치우며 학원을 다닌 2000년대에도 여전히 가난의 탈출구가 교육이었음이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에게 ‘학원’은 뛰어넘으면서도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엄마는 “영혼까지 끌어모아” 학원을 보내줬다. 학원은 갔지만 ‘집’ 앞에 내려주는 학원 셔틀버스 안에서의 대화에는 끼어들 수 없었다. 주공아파트에 산다고 말했을 때 돌아온 친구들의 시선은 애매모호했다. 저자는 입을 닫았다. 저자는 2018년 LH공공임대아파트를 두고 ‘거지’라며 낙인과 혐오 표현이 유행한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임대아파트 주민들 출입구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죄책감이 들었다고 했다. 죄책감은 그때 아무 말 하지 않고 아파트 커뮤니티 헬스장에서 운동하는 엄마를 둔 척, 해외여행을 다닌 척 조용히 있었던 저자가 지금 ‘가난’을 직접 말하는 이유로 이해된다.

저자는 ‘진짜 가난’ ‘가짜 가난’을 여러번 묻는다. 의료비 부분에서도 그렇다. 기초생활수급자의 병원 진료비는 1000원, 약값은 500원이었다. 기초수급의 ‘지원’을 받을 때 함께 받았던 노골적인 냉대와 동정의 눈빛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병원에선 끊임없이 ‘아버지가 진짜 눈이 안 보이는 게 맞지? 어머니가 진짜 교통사고 때문에 정규직으로 일하지 못하시는 것도 맞지?’라며 계속 ‘진짜’가 맞는지 물었다. “가난이 진짜가 아닐 수가 있나.”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더해 ‘수급의 딜레마’라는 사회적 문제도 말한다. 기초생활수급은 최저 수준을 가정하고 지원된다. 더 가난해지지 않으려면 일을 해야 하는데 일정 금액 이상 수입이 생기면 지원비율이 떨어진다. 악순환이 벌어지는 구조다. 젠더 노동 문제도 불거진다. 결혼으로 경력 단절이 생긴 저자의 어머니에게는 일정 수준 이상의 일자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일인칭 가난>의 저자는 가족을 말하면서 “가난의 8할을 차지하지만 9할까지는 아닌”이라고 표현했다. 김상민 화백. 경향신문 자료사진

가난의 출발이었을 것으로 흔히들 예상하는 ‘가족사’는 33개 일화 가운데 22번째에서야 등장한다. 저자는 가족을 말하면서 “가난의 8할을 차지하지만 9할까지는 아닌”이라고 표현한다. 그의 아버지는 사고로 시력을 잃었고, 알코올 중독자가 됐다. 갚지 못한 술값만 해도 수천만원이었다.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고모, 외삼촌 등 굴곡진 가족사를 남 이야기하듯 풀어낸다.

안온은 전화 인터뷰에서 “가족을 의도적으로 뒤에 배치했다”며 “ ‘집이 그 모양이니까 가난했지’가 아니라 제 모든 가난 속에서는 은폐된 사회적 시스템이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엄마가 큰 회사에 다녔지만 결혼했다는 이유로 사직해야 했다. 엄마가 회사를 끝까지 다녔더라면 어땠을까”라며 “경력 단절이 없었다면 자립 가능성이 있었을 테고, 수급자 제도의 딜레마가 없었다면 수급 기간이 이렇게까지 늘어나지 않았을 것 같다”고 했다.

저자는 책을 쓰면서 ‘진짜 가난처럼 느끼지 못할까봐’ 걱정했다고 했다. 그는 “ ‘가난한 줄 몰랐다’ ‘티가 안 났다’고 하는데 그건 스테레오 타입의 가난이 존재한다는 것”이라며 “저희 세대에는 정말 가난해도 ‘패딩’ 정도는 입을 수 있는데, 패딩 사이에도 계급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안온은 책에서 주공아파트 시절을 같이 보낸 친구들과 취업을 말하며 “20대 청년이라든가, MZ세대 같은 용어의 기본값에 우리가 포함될까”라고 묻는다. 가난한 이들에겐 취업을 준비할 시간, 내일의 힘을 더해줄 질적으로 풍부한 식사와 숙면을 취할 시간, 미래를 계획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면서 “청년에서 여성이 배제되고, 20대에서 가난이 고려되지 않고, MZ를 고생을 모르는 세대로 취급하는 사회”라고 지적한다.

대학시절부터 밤잠 안 자고 학원강사와 과외를 한 저자는 2019년 기초생활수급에서 벗어난다. “무슨 작가냐” 소리를 듣더라도 대학원에서 문학을 전공해 석사를 수료한다. 지금도 학원강사이지만 언젠가 작가가 되고 싶다. “가난한 사람은 누구보다 강력하게 지금의 현실을 벗어나고 싶지만 누구보다 강하게 현실에 묶여 있다. 살기 위해 했던 학원 일로 이력을 채워온 나는 언젠가 학원을 창업하겠다고 생각한다. 이 계획이 의외로 자연스러워서 깜짝깜짝 놀란다. 학원 일이 언제부터 나의 장래 희망이 되었나.”

‘안온’은 필명이다. 한자로 ‘편안할 안(安)’ ‘편안할 온(穩)’이다. 글을 쓰고 나면 편안해진다는 의미이지만 반대 뜻도 있다. 부정어 ‘안’이다. “저는 안 편안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불편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빈곤이나 가난에 대한 저서들은 대부분 연구서적입니다. 그건 연구자의 학술적 시선에 사람들이 포집되는 겁니다. 연구대상 스스로 발화하는 가난은 적지 않습니까. 연구대상 스스로가 발화할 수 없었던 것은 우리 사회가 가난이라는 말에 대해 누군가는 혐오하고, 연민하고 공포하는 상황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에요. 연구대상인 그 사람들 목소리가 커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제 자체가 연구입니다.”

임지선 기자 vision@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